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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Jul 31. 2018

모든 것을 덮는다.
또한 모든 것을 드러낸다.

áo dài

베트남 전통의상으로, 북부에서는 ‘아오자이’, 남부에서는 ‘아오야이’로 발음한다. 위에 걸치는 긴 옷이란 뜻이다. 여성만의 전유물로 알려져 있으나, 남성 아오자이도 있다. 일부 전문가 사이에서 과연 현재의 아오자이에 전통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된 복식이 아니라, 근대에 억지로 끼워 맞춘 측면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베트남 여성들의 피 눈물 나는 각고의 노력이 깃들어있다.


15세기 전의 베트남 여성들은 ‘아오 뚜 턴(Áo Tứ Thân)’이라는 옷을 입었다. 허리 아래가 네 부분으로 갈라진 긴 드레스로, 농사와 같은 작업 시에는 앞의 두 갈래를 벨트에 묶을 수 있도록 고안된 옷이었다.

베트남 전통의상

이 옷은 중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기 시작한 게 이때부터였다. 여성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복식이었다. 중국으로부터 독립한 뒤에도 유교 문화는 남았다. 여성의 몸에 꼭 맞는 복장은 오랫동안 금기되었다. 바지에 헐렁한 옷이 대부분이었다. 


새로운 전기를 맞은 건 프랑스 식민지 시절이었다. 서구문화의 유입은 복식에도 큰 변화를 일으켰다. 같은 시기 중국에서 유행하던 치파오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하노이를 중심으로 단색 위주의 색감이 화려하게 바뀌면서 몸에 꽉 끼는 옷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통이 좁던 바지는 나팔바지처럼 아랫단이 넓었으며, 엉덩이 부분이 꼭 끼었다. 전체적으로 여성의 몸매가 드러나도록 재단된 지금과 흡사한 아오자이의 첫 등장이었다. 무엇보다 벨트가 사라진 건 획기적이었다. 여성들은 환호했다. 마치 코르셋을 벗어던진 유럽 여성들처럼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다. 유행은 순식간에 베트남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어찌나 속도가 빨랐는지 옷감이 생산되어 팔리기도 전에 시골 촌구석의 여성들까지 나서 새로운 옷을 입겠다고 난리였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두고 두 가지 목소리가 나왔다. 우려하는 쪽에서는 새로운 복장이 전통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선정적이라고 꼬집었다.(당시에 발표된 신문에는 밭일을 하던 농부가 맞은편 아낙의 둔부를 보고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는 식의 내용이 제법 많다.) 반면 찬성하는 쪽에서는 여성의 옷은 여성이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항변하였다.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지만, 핵심은 노동력이었다. ‘노동의 상실’과 ‘착취로부터 해방’이라는 불씨가 남은 채로 번성하던 아오자이는 독립과 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격변에 휩싸였다. 북베트남은 아오자이를 부르주아의 의상이며, 식민지 잔재라고 규정했다. 다른 의상에 비해 옷감이 많이 들고, 움직임을 제한해 노동자의 옷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심지어 호치민까지 나서 아오자이를 입지 말자고 호소할 정도였다. 북베트남 여성들은 아오자이를 버리고 인민복을 선택해야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 아래 있던 남베트남은 사정이 달랐다. 남베트남 여성들은 아오자이를 즐겨 입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몸매를 드러내는 쪽으로 발전시켰다. 어깨 부분을 따로 달지 않고 목에서 바로 소매로 이어지는 ‘래글런(raglan)’ 스타일의 아오자이가 나온 게 이 무렵이었다.

소수민족 의상

1975년,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자, 아오자이는 또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전통의 수호와 신문화 사이의 케케묵은 갈등이었다. 무엇이 전통이냐는 문제에서 아오자이는 자유롭지 못했다. 전통의상인 ‘아오 뚜 턴’과는 분명 다른 옷이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의견은 무시되었다. 다양성을 용인하지 않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아오자이는 명절 때나 꺼내 입는 옷으로 전락했다.


아오자이가 새롭게 부활한 것은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경기 호황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변화의 주축은 여성들이었다. 여성운동의 시발점을 아오자이로 잡고 보급에 힘을 쏟았다.(아오자이에는 여성, 저항, 변화의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학교와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교복과 유니폼으로 아오자이가 선택되었다. 더불어 국제 패션쇼, 세계전통의상대회, 미인대회 등에 출전하면서 전 세계에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아오자이의 대중화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의상이다. 하지만 세계의 여성에게 모멸감을 주는 옷이다.”

한 유명 디자이너의 한탄은 아오자이가 세계 시장에 던진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준다. 그 후로도 아오자이는 계속 변모하였다. 새로운 색상과 문양이 시도되었고, 다양한 소재가 접목되었다. 특히 목 부분과 소매의 변화는 유행 패턴이 빨랐다. 베트남 역사의 부침 속에서 아오자이는 항상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그때마다 여성들은 항상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갔다.

하지만 오늘날, 아오자이는 더 이상 대중적인 옷이 아니다. 13년 만에 방문한 베트남의 거리에서 아오자이는 보이지 않았다. 공공기관, 은행, 학교, 상점에서 모든 여성들이 입던 아오자이는 이제 특별한 날에만 입는 의상이 되었다. 아직 교복으로 입는 학교도 있었으나, 수가 적었다. 


불편한 옷이긴 하다. 제대로 만들려면 신체의 30군데를 재야 한다. 일반 재봉소에서도 최소 18군데를 잰다. 결코 단순한 복장이 아니다. ‘모든 것을 덮는다. 또한 모든 것을 드러낸다.’ 이 유명한 말이 아오자이의 모든 것을 함축한다. 베트남 여성들은 스스로 아오자이를 선택했고, 스스로 아오자이를 버렸다. 


2006년 베트남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아오자이를 입은 각국의 정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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