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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Aug 08. 2018

콰이어트 아메리칸

베트남 영화

베트남을 소재로 한 영화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언뜻 생각나는 것만 추려도, 알 포인트, 그린파파야 향기, 시클로, 굿모닝 베트남, 님은 먼 곳에, 팬(Pan), 식물학자의 딸 등이 있고, 거슬러 올라가면 플래툰, 풀 메탈 자켓, 지옥의 묵시록, 연인, 디어 헌터, 택시 드라이버, 심지어 람보도 월남전을 다루는 영화다. 


일찍이 한 나라를 배경으로 이처럼 많은 콘텐츠가 양산된 적은 없었다. 세계 현대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 베트남에서 펼쳐졌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다. 서구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 시기엔 ‘뜨거운 감자’였고, 냉전시대엔 ‘떨어져 나간 살점’이었으며, 현재는 ‘수중에서 잃어버린 보석’이다. 상실감이 사라지지 않는 한 베트남을 소재로 한 영화는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내가 인상 깊게 본 영화는 ‘조용한 미국인(The Quiet American, 2002)’이다. 영국 작가 그레이엄 그린(Henry Graham Greene, 1904~1991)이 1955년에 발표한 ‘콰이어트 아메리칸’이 원작이다. 사이공에 있는 콘티넨탈호텔 214호에 장기 투숙하며 이 작품을 집필한 것으로 전해진다.(당시 서양인에게 동양은 홍콩, 도쿄, 사이공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애정과 스릴러가 접목된 그의 작품은 독자층이 넓어 ‘조용한 미국인’이 발표되었을 때에도 큰 호응을 얻었다.

그레이엄 그린과 조용한 미국인 초판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www.globalrarebooks.net

그린은 한때 열렬한 공산당원이었고 반미주의자였다. ‘카스트로’와 ‘오르테가’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래서 CIA에서 그를 별도로 관리한 파일이 공개되었을 때 독자들은 놀라기보다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소설과 삶이 일치하는 작가로 밝혀지면서 호감도만 올려놓았다.


소설을 영화화한 것은 ‘패트리어트 게임’을 연출한 호주 감독 ‘필립 노이스’였다. 그는 2000년 초반 가족들과 함께 호치민으로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호텔에 비치되어 있던 이 소설을 읽었다. 소설의 외피는 한 베트남 여성과 두 외국인 남성 사이의 삼각관계를 다루는 듯했지만, 놀랍게도 10년 뒤에 벌어질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예시하고 있었다. 눈이 번쩍 뜨인 필립은 책 표지를 다시 보았다. 제목부터 의미심장했다. 자비로운 독일인, 깨끗한 중국인만큼이나 역설적인 표현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소설을 다 읽은 필립은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힌다. 호주로 돌아온 그는 각색가 크리스토퍼 햄튼에게 즉각 시나리오 작업을 맡긴다. 시나리오나 나오자마자, 제작사를 찾아 나선다. 일이 잘 풀리려고 그랬는지 카메라감독에 크리스토퍼 도일이 영입되고, ‘미이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브랜든 프레이저’와 연기라면 둘째도 서러운 ‘마이클 케인’이 주인공으로 캐스팅된다. 영화 제작은 순탄대로였다. 베트남 당국의 협조도 잘 이뤄졌다. 호치민과 하노이, 탄빈, 호이안에서 로케를 하고 실내 장면만 호주 스튜디오에서 찍었다. 얼마나 현장감이 살아있는지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공기까지 그대로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렇게 탄생한 영화는 당시 911 테러의 여파로 무기한 개봉이 연기되는 불운을 겪는다. 창고에 처박힌 이 영화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건 토론토영화제를 통해서였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마이클 케인의 연기에 열광하면서 입소문이 나자, 제작사인 미라맥스가 뒤늦게 개봉일정을 잡았다. 제작되고 나서 2년이나 지난 뒤였다.


영화는 나이 든 영국인 저널리스트의 지극히 감성적이고 모호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평소 베트남에 대한 내 생각을 담아내는 것 같아서 각별히 좋아하는 부분이다.

‘나는 왜 베트남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여자들이 목소리가 매혹적이어서? 모든 것이 강렬해서? 강렬한 색깔과 강렬한 냄새, 심지어 내리는 비까지. 그러나 런던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선 무엇을 찾든 구할 수 있다. 사이공에 오는 순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는 살아봐야 안다. 처음 느끼는 것은 냄새다. 영혼을 대가로 모든 것을 약속하는 냄새. 그리고 더위. 셔츠는 금세 땀에 젖는다. 자신의 이름조차 잊고, 무엇 때문에 도망쳤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밤에는 바람이 분다. 이곳의 강은 아름답다. 만일 전쟁이 없었다면, 총격전이 아니라 불꽃놀이였다면, 나는 한대의 아편과 사랑하는 여인의 손길만을 생각했을 것이다.’


미국인의 시체가 강에 떠오르는 것으로 시작한 영화는 1950년대의 베트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동커이 거리와 음악당, 콘티넨탈호텔, 그리고 호이안까지, 내러티브를 떠나 시각적인 재미가 쏠쏠하다. ‘푸엉’ 역으로 나온 ‘도 티 하이 옌’은 베트남 여성의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저널리스트로 나온 ‘마이클 케인’의 연기는 숨에서조차 고뇌가 풍겼다. 


그동안 영화의 배경으로만 쓰이던 베트남은 최근 부쩍 제작에도 힘을 쏟고 있다. CJ와 합작한 영화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영화가 핵심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떠올랐다. ‘수상한 그녀’의 베트남판인 ‘내가 니 할매다’(제목이 이상해서 찾아보니, 원제가 그렇다)에 무려 1,200만 명이 몰려들면서 베트남 역대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상영관이 많지 않은 사정을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때맞춰 우리나라 기업들의 투자가 줄을 잇는다. 얼마 전 개봉한 ‘라라’는 아예 베트남 배우를 캐스팅하고 베트남에서 촬영했다. 겉으로는 한국과 베트남 두 마리의 토끼를 잡겠다는 전략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베트남으로 기울고 있다. 어느 쪽에 마케팅과 홍보를 더 주력하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앞으로 이런 경계의 영화가 계속 나올 것이다. 베트남과 합작으로 80년대를 풍미했던 드라마 ‘모래시계’를 영화로 제작하겠다고 나선 것도 그런 일환으로 풀이된다. 최근에 개봉한 ‘써니’의 베트남 판 ‘고고 시스터즈’의 흥행도 눈여겨 볼만하다.

인도는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구석이 없으니 제쳐 두고, 우리나라와 베트남, 일본, 중국 시장을 놓고 비교해보면 결과는 자명하다. 한국은 국민 수도 적은 데다, 평균 나이가 높다. 일본은 인구가 많지만 평균 나이가 거의 50세에 육박한다. 시장에서 말하는 소위 영화 소비를 주도하는 층이 아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다르다. 1억이 넘는 인구에 젊은 층이 매우 두껍다. 평균 나이가 30세가 채 되지 않는다. 어느 보고서에 따르면 이런 황금기가 2040년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소비재뿐만 아니라, 문화콘텐츠도 중국과 베트남이 선도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류도 10년 이내에 사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제는 아시아에서 조용한 한국인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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