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우연 Sep 03. 2018

벤탄시장에서 흥정하는 법

호치민 시의 상징은 누가 뭐래도 벤탄시장이다. 

원래 있던 곳은 프랑스가 강제로 점령하면서 소실되었고, 현재 레로이에 위치한 벤탄시장은 프랑스에 의해 2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1914년에 완공되었다. 1944년 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을 상대로 한 연합군의 폭격으로 시장의 일부가 파괴되었다가, 1950년에 복원되었다. 

호치민 시의 보도블록, 벤탄마켓을 형상화했다

벤탄시장은 서울의 광화문과 같은 랜드마크다. 베트남 근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군중이 모이던 곳이다. 1951년, 프랑스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대가 데모를 벌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63년엔 석가탄신일을 기점으로(후에에서 일어난 불교 탄압 사건이 계기가 되어) 학생들과 승려들이 수개월 동안 시장 앞에서 점거농성을 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승려 ‘틱꽝득’의 소신공양이 있었다.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이고 죽을 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던 노승의 모습에 세계는 경악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응오 딘 지엠’은 자리에서 쫓겨났다.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동생의 와이프가 “땡중 하나 죽었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라고 한 말이 불씨가 됐다.


그 후로도 벤탄시장은 파란만장한 베트남의 현대사 속을 지나왔다. 남베트남 시절에는 신문물이 들어오는 통로로, 통일된 뒤로는 보급품 배급처로 사용되었다. 자유시장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던 1990년부터는 산업의 첨병 노릇을 했고, 밀수품과 불법 복제품, 장물이 거래되는 온상이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한때 용산전자타운에 버금가는 컴퓨터 조립품이 주변 상권을 장악할 때도 있었다.


호치민에 살 때 구경만 두어 번 했을 뿐, 나는 벤탄시장에서 물건을 산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 물건을 사는 행위는 국제적 호구를 인정하는 증표였다. 벤탄의 셀러들은 프로다. 전 세계 뜨내기들이 하루에도 수만 명씩 방문하는 곳에서 적어도 10년 이상 노하우를 쌓은 전문딜러들이다. 아무리 흥정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바가지를 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다른 곳보다 최소 2배 이상 높은 가격에서 흥정이 시작된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호텔이 벤탄시장 바로 옆이었다. 밤에 야시장에 나가보았다. 큰 아이가 신기에 적당한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을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생각한 것보다 높았다. 흥정의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① 일단 반을 깎는다. (초기 가격 설정이 매우 중요하다.)

② 판매자는 고개를 젓는다.

③ 물건에 관심을 보이면서 안타까운 듯 나가는 시늉을 한다.

④ 판매자가 붙잡는다. 계산기를 내보이며 금액을 제시하라고 한다.

⑤ 나는 방금 전에 내가 부른 가격보다 더 낮게 계산기를 두드린다.

⑥ 눈이 휘둥그레진 판매자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이 최저치로 줄 수 있는 금액을 알려준다.

⑦ 나는 고개를 흔들며 딴청을 피운다. 다른 가게를 기웃거린다.

⑧ 판매자가 다시 붙잡는다. 또 계산기를 내보이며 금액을 제시하라고 한다.

⑨ 못 이긴 척 계산기에 내가 생각하는(갖고 싶은 충동, 다른 가게와의 비교, 상대와 나의 기대 가격 편차, 디자인 등등을 고려한) 금액을 최종으로 알려준다.

⑩ 판매자는 손해를 본다는 얼굴로 마지못해 물건을 내어준다.


이 과정은 생각보다 길어질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핵심은 사겠다는 '의지'와 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의 균형에 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도 구매자가 손해를 본다. 마치 썸 타는 연애 초기처럼 적당한 선에서 밀고 당기기를 잘해야 한다. 더불어 거래가 성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리스크를 감수하는 대범함이 필요하다. 계속 기대를 심어주면서 주변을 서성이는 것이 중요하다. 


잘 하면 처음 판매자가 제시한 금액의 절반보다 밑인, 1/3 가격에 구매가 가능하다. 좀 귀찮은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베트남에선 필수다. 그들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장사꾼은 씌울 의무가 있고, 손님은 깎을 권리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흥정과 성격이 다르다.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는 서툴지만 그들에게 흥정은 반듯이 거쳐야 하는 상거래 과정이다. 터무니없는 금액을 부르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고, 막무가내로 깎는 것이 우리의 권리다. 

2004년 벤탄마켓의 모습

그들에겐 단골이란 프리미엄이 없다. 개별 건마다 흥정을 해야 한다. 따라서 안면이 있다고 그냥 깎아주지 않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골동품거리가 벤탄시장 근처에 있을 때였다. 비싼 건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잘 보면 싼 가격에 좋은 물건을 고를 수 있었다. 몇몇 가게와 친밀해졌으나, 그들은 절대 양보하는 법이 없었다. 우리가 단골 호구가 되었다는 것을 알기까지 오랜 경험이 필요했다.


그러다 아내가 너무 갖고 싶어 하는 장이 나타났다. 오래되지 않은 프랑스풍의 나무 장식장이었다. 비싼 가격이었지만 아내는 그 장식장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작전이 필요했다. 처음엔 가격만 물어보았다. 다음엔 이리저리 살피고 가격을 물어보았다. 그 다음번엔 괜히 흠을 잡았다. 고리가 이상하다느니, 경첩이 떨어졌다느니, 흥정은 하지 않고 그렇게 열 번쯤 방문하자, 판매자가 처음 가격의 절반을 불렀다. 한 달만의 일이었다. 번거롭게 생각했으면 그 장식장이 10번이 넘는 이사를 거친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콰이어트 아메리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