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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Aug 18. 2018

한강을 건너

호이안으로 갔다

호이안을 가게 된 건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건기라 그리 덥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은 30분을 걷지 못했다. 30분이 마지노선이었다. 30분 걷고 음료를 먹이고, 또 30분 걸어서 에어컨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하루에 돌아볼 수 있는 관광지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스크림과 째(Chè), 신또(sinh tố)가 무한정으로 투입되었다. 더위보다 당 섭취 과잉으로 쓰러질 판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눈길을 돌렸다. 호치민과 가까우면서 비교적 날씨가 선선한 곳을 찾았다. 물망에 오른 달랏과 호이안을 놓고 저울질하다가 호이안으로 낙점됐다. 다른 곳과 달리 관광지가 한 군데에 몰려있는 데다, 관광객이 적어 가족들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교통 편부터 알아보았다. 


열차가 있었다. 예전엔 기차 티켓을 끊으면 돌덩이처럼 딱딱한 빵이 함께 지급됐다. 새벽마다 사이공역에서는 탑승객들이 얼굴보다 큰 빵을 들고 기차에 오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그땐 열차 칸과 칸 사이의 좁은 난간에서 연탄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쌀국수를 끓여 파는 장사치가 있었다. 이동식 간이식당인 셈이었다. 말리는 사람도 항의하는 사람도 없었다. 승객은 달리는 열차 안에서 배급받은 빵에 고기를 넣어 먹으며 이동시간의 지루함을 달랬다. 아직도 남아있는지 궁금했다. 


돌처럼 딱딱하고 고무처럼 질긴 추억의 맛을 떠올리며 열차편을 알아보다가 마지막에 비행기로 마음을 돌렸다. 하루 종일 비좁은 기차 안에서 아이들과 버틸 자신이 없었고, 무엇보다 비행기 값이 터무니없이 쌌다. 우리는 베트남 여행 7일 차가 되는 시점에 호이안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서

국내선 출국장으로 인터넷에서 미리 예매해둔 표를 발권받으러 갔다. 비키니 수영복 차림의 유니폼으로 유명한 저가항공사 ‘비엣젯’ 창구였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국가대표팀이 탄 비행기에서 비키니 쇼를 해서 물의를 일으킨 바로 그 항공사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창구에 서있는 직원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성이었다. 그런데 발권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항공사 직원은 보기와 달리 꽤 예리한 눈썰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 여권 상의 이름과 예약된 이름이 다르다는 것을 잡아냈다. 내 티켓에만 패밀리 네임이 Moon이 아닌 Moom으로 표기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약 과정에서 타이핑을 제대로 하지 못한 명백한 나의 실수였다. 


티켓을 취소하고 다시 끊거나, 이름을 변경해야 한다고 직원이 설명했다. 두 방법 다 비용이 발생하는 일이었다. 나는 다른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청렴하고 강직한 청년이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나와 내 자식들의  성이 다를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면서, Moom이라는 성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 대통령의 성 또한 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태블릿 PC를 꺼내 내 눈이 얼마나 안 좋은지, 또 타이핑을 하기에 나의 손가락이 얼마나 두꺼운지 항공사 직원에게 시연해 보였다. 실제 M과 N은 옆에 붙어서 동시에 두 개가 눌러졌다. 항공사 직원은 내가 하는 행동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눈을 감아주었다. M과 N의 근소한 차이는 심사대의 날카로운 눈을 피했고, 다행히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2004년 다낭에서 호치민으로 올 때 탄 비행기에 비하면 이번 비행기는 저가임에도 매우 훌륭했다. 그땐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자리에 앉아서 동체와 날개의 이음새로 날벼락이 쳤고, 강풍에 비행기가 한 번씩 휘청거릴 때마다 의자가 요동을 치며 울어댔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그날, 우리 부부는 낡아빠진 비행기 안에서 생애 마지막이라는 듯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괴성을 질렀다. 그때 만일 의자의 나사가 풀렸다면 나는 맨손으로라도 기꺼이 조일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지옥의 1시간이 이번엔 나른한 1시간으로 바뀌어 다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한강을 건너

택시를 불러 호이안으로 이동하는 중간에 다낭 시내를 둘러보았다. 다낭을 가로지르는 강의 이름은 한강이다. 이름만 같은 게 아니고, 한강만큼 크고 넓다. 베트남은 겉보기와 달리 좀 복잡한 나라다. 50여 개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고, 크게 3개의 문화가 공존한다. 남부의 메콩강을 기점으로 하는 크메르문화와 북부의 홍강을 중심으로 한 동손문화, 그리고 중부의 한강을 기반으로 하는 참파문화가 그것이다. 다낭은 바로 참파문화의 본거지다. 곳곳에 흔적이 남아있다. 음식과 관습도 좀 다르다. (개인적으로 베트남에서 후에와 다낭 음식이 제일 입에 맞는다. 저렴한 가격은 물론이고) 참파문화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와 미얀마의 바간에도 큰 영향의 미쳤다.

미케 해변 쪽은 다국적 기업들이 벌써 선점해 앞 다퉈 개발에 박차를 올리고 있었다. 해변의 길이가 20km에 달한다고 하니, 범위로 보면 지상 최대의 리조트 단지가 형성되는 것은 아닌지 몰랐다. 다낭부터 호이안까지 빼곡히 들어선 리조트는 한 뼘의 빈 구석도 용납하지 않았다.


택시가 호이안 입구로 들어서기 전부터 입이 벌어졌다. 호이안은 내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한적하고 고요할 것이란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골목과 상점은 관광객으로 꽉 들이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좀처럼 단체관광을 하지 않는 일본인들조차 떼로 나타나서 거리를 가득 메웠다. 다낭에서 당일코스로 버스를 타고 건너오는 단체관광객들이었다. 일본, 한국, 중국어가 사방에서 어지럽게 쏟아졌다. 특히 한국인 관광객이 압도적이었다. 다낭에 관광객이 몰린다는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호이안에까지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강을 건너는 다리 위에서

호텔에 짐을 풀고 구시가지로 나왔다. 아내와 나는 달라진 호이안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오토바이 때문에 걷기 버거웠다. 차량의 통행이 금지된 구시가지가 그나마 안전했으나 사람들에게 치여 사진 찍는 것도 힘겨웠다.


14년 전의 호이안은 호젓한 곳이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천천히 산책을 즐기다가 강변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 좋은 곳이었다. 자전거로 지나가는 아오자이의 여인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맛이 있었다. 특별히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유유자적 책을 옆에 끼고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해가 지는 강을 보기 좋았다. 그러나 이제 그런 낭만은 사라졌다. 자전거보다 오토바이가 많았고, 그보다 몇 백 배나 많은 관광객이 있었다. 골목을 따라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2004년의 호이안, 강 위에 양철지붕을 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여간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월남에 30만 명을 파병한 한국군이 주둔한 곳이 다낭과 호이안 일대였다. ‘아가야 기억해라. 그들이 우리를 구덩이에 몰아넣고 모두 쏘아 죽였단다.’라고 구전되는 자장가와 ‘한국군 증오비’가 지금도 멀지 않은 곳에 남아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하미마을을 비롯한 몇몇 지역은 한국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그런데 현재 베트남을 통틀어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여행지가 되었다. 한 해 동안 30만 명의 열 배인 300만 명이 다낭으로 몰리고 있다.     

2018년의 호이안

미아

피서철 해운대 버금가는 인파의 북새통에 결국 일이 터졌다. 내 꾀에 내가 넘어간 꼴이었다. 아이들을 줄줄이 끌고 다니는 게 힘에 부쳤던 나는 일본교 근처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아내와 아이들을 놓고 다음날에 할 투어상품을 예약하기 위해 혼자 여행사를 찾아갔다. 그 사이에 사달이 났다. 우리 가족은 공용 이동식 와이파이를 사용했다. 아내는 해외 로밍을 하지 않은 핸드폰을, 나는 핸드폰 없이 아이패드를 사용했다. 티켓을 끊으러 간 내가 이동식 와이파이를 가져간 상태였다.

어린이 보호구역을 알리는 표지판이 그대로였다. 어찌나 반갑던지 팔짱을 끼고 한참 서있었다.

발단은 이랬다. 아이스크림을 먹은 둘째는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화장실이 없었다. 형과 함께 근처에 있다는 공용화장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입장료가 있던 모양이었다. 엄마한테 쪼르르 달려와 돈을 달라고 했다. 엄마는 아빠가 돈을 다 가져가 지금 돈이 없으니, 다른 곳의 화장실을 알아보라고 했다. 엄마는 막내가 붙어있어서 꼼짝할 수 없었다. 두 녀석은 화장실을 찾아 근처를 헤맸다. 간신히 어느 한 가게에서 볼일을 볼 수 있었다. 소변을 보고 나온 두 녀석은 방향을 잃었다.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건물은 다 비슷비슷했고 길은 복잡했다.


당황한 아이들은 엄마가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아 뛰었다. 뛸수록 엄마와의 거리는 멀어졌다. 그 사이, 아내는 오지 않는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가게에서 나가 찾으러 다닐 수도 없었다. 같은 시각, 나는 대기자가 많은 여행사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천하태평 티켓을 끊고 있었다. 


20분이 넘었다. 아내는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나타나지 않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졸였다. 30분이 넘었다. 속에서 애간장이 끓었다. 이제 정말 더 기다리기만 할 수 없어 막내를 업고 근방을 찾아 나섰다. 그때 어느 한 한국인 청년과 함께 두 아이가 나타났다. 둘째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불어 있었다. 금붕어가 따로 없었다. 한국인 청년은 아이들이 알려주는 엄마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자, 아이들의 설명을 듣고 같이 길을 찾아 나섰다. 아이스크림 가게가 두어 군데라 어렵지 않았다.


엄마를 본 둘째는 안도감에 다시 눈물을 쏟았고, 동생을 보호하지 못하고 길까지 잃은 첫째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엄마는 놀란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막내는 막내대로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때 일을 끝마친 내가 유유자적 나타났다. 


얘기를 전해 들은 나는 좋은 경험을 했다며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게 실수였다. 내 머릿속엔 온통 다음날에 있을 투어와 환전해야 할 돈 생각뿐이었다. 토라진 아내는 다음날 아침밥을 먹을 때까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쿠킹 클래스 투어

호이안은 그 자체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어 특별히 다른 관광상품을 개발할 필요가 없었다. 강변투어와 미손 유적지 탐방 정도가 그나마 구경거리였다. 그런데 이번에 가보니 많은 투어 프로그램이 여행객의 흥미를 자극했다. 자전거투어와 같은 액티비티한 여행상품부터 전통문화투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이 준비되어 있어서 선택의 폭이 넓었다. 

그중 하나가 쿠킹 클래스였다. 진행은 단순했다. 먼저 시장에 가 음식 재료를 구경한다. 호이안 강을 따라 전통 배를 타고 근교로 이동한다. 한 농가에서 요리를 배우고 직접 체험한다. 메뉴는 스프링롤과 반세오, 생선찜, 파파야 샐러드 등으로 만들기 쉽고 손이 많이 가지 않는 것들이다. 아내와 나뿐이었으면 하지 않았을 투어였지만 아이들이 좋아했다.


호이안의 많은 투어 중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다. 10여 개의 각기 다른 곳에서 개별적으로 운영된다. 우리 가족 다섯 명의 참가비가 80불가량 했다. 특히나 서양인들의 참여율이 높았다. 투어를 하면서 내가 사는 제주에 벤치마킹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세계유산 4관왕만 내세울 뿐 이런 상품 개발에는 미온적이다. 외국인이 제주에 와서 관광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하게 할 것인지 고민해보아야 할 시점이다.


몸국, 빙떡, 갈칫국, 고등어조림, 한치회, 자리물회 등 베트남 요리 못지않은 다양한 음식을 소개할 수 있다. 들어가는 재료도 제주산만으로 가능하다. 자연환경은 한순간으로 사라지지만 문화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우리 아이들이 20년 후에 세계문화유산의 호이안을 기억할 것인지, 아니면 그때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음식을 떠올릴 것인지는 뻔하다. 게다가 음식은 부가적인 수익까지 창출할 수 있다. 입맛을 사로잡는 것이 진정한 현지화 전략이다. 그날 투어에 참가한 외국인들은 하나같이 찹쌀가루와 코코넛 나무로 만든 도마, 채소 다듬는 채칼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일부는 투어가 끝나자마자, 시장으로 달려가 제품을 구매했다.     


안방비치

개인적으로 호이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이른 아침에 큰 아이와 자전거를 타고 구시가지를 도는 것이었다. 문 닫은 상가와 관광객이 없는 호젓한 거리를 천천히 둘러보니, 비로소 숨어있던 호이안의 빛깔이 되살아났다. 우리는 흐르는 강물을 따라 강변길을 달렸다. 돌아오는 길에 일찍 문 연 카페에서 커피와 음료를 마셨다. 베트남에 온 뒤로 처음 갖는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그 맛에 들려 다음날 호텔을 출발해 안방비치까지 자전거를 탔다. 호텔에서 무료로 빌려주는 자전거가 있었다. 둘째에게 맞는 자전거가 없어, 형의 자전거에 태우고, 내가 막내를 뒤에 태우고, 아내는 혼자 자전거를 몰았다. 세 대의 자전거가 오토바이에 뒤섞여 도심을 빠져나갔다. 이름부터 편안하게 들리는 안방비치까지는 먼 길이 아니었다.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논길을 지나 30분가량 달려가니 해안에 닿았다. 그때 사람들이 갑자기 길로 튀어나왔다. 자신의 가게 앞에 자전거를 대라는 손짓이었다. 클럽을 홍보하는 삐끼들처럼 손짓 발짓 가리지 않았다. 나는 안방비치를 알리는 표지석까지 달려갔다. 해변에는 자전거 출입이 통제되었다. 옆 주차장에 자전거를 대고 한 대 당 1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선금으로 지불한 후 해변으로 들어갔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사람이 없었다. 크기만 넓을 뿐, 볼품없는 해변이었다. 물빛은 탁했고 파도는 거칠었다. 제주에 사는 우리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는 해변이었다. 바로 앞의 참섬은 범섬이나 비양도처럼 매력적이지 못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바다는 역시 바다였다. 사계바다에서처럼 모래를 파고, 성을 쌓고, 코코넛 껍질을 발로 차면서 모래사장을 뛰어다녔다. 


그동안 아내는 조개를 주웠다. 비치코밍 아티스트인 아내는 바다에 갈 때마다 양손에 가득 쓰레기와 조개껍질 따위를 줍는다. 파도에 떠밀려온 조개와 유목들은 아내의 손을 거쳐 작품이 된다. 한참 쪼그리고 앉아 바닷가를 뒤지던 아내는 별로 건질 게 없다며 일어섰다. 우리는 한국관광객이 먹여 살리는 값비싼 식당들을 지나 해변에서 벗어난 뒷길을 걸었다. 아무도 없는 이면도로에 그나마 볼거리가 있었다. 이름 모를 새와 이름 모를 나무와 꽃이 아무도 모르게 피었다가 지고 날아갔다.


산책을 마치고 자전거를 찾으러 갔다. 가만 보니 우리가 자전거를 맡긴 주차장은 공인된 곳이 아니었다. 아예 공인 주차장이라는 것이 없었다. 모두 사설로 맨 땅에 천막만 두르고 주차료를 받는 식이었다. 주차료라는 것도 정해진 것이 없이, 누구는 한 대에 1달러를, 누구는 2대에 1달러를 받았다. 다른 주차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경쟁이 있어서 서로 자신들이 운영(?)하는 주차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자전거를 끌고 오는 관광객이 나타날 때마다 호객행위를 했다. 꽤 짭짤한 수익이었다. 해안에 자전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관리소와 모종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쩐지 관리소 직원이 손짓으로 주차장을 가리킨 것부터, 주차관리원의 행색까지 모두 이상하더라니. 자전거는 뒷길 아무 곳이나 세워도 상관없었다. 실제 그렇게 하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나는 내지 않아도 될 돈을 낸 것도 모자라, 바가지까지 쓴 셈이었다. 그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있으려니 은근히 배알이 꼴렸다. 비수기에 저 정도면 성수기엔 오죽할까.


폐쇄적인 사회일수록 이런 일이 많다. 제주도 다르지 않다. 관광지에서 자치도가 관리하며 주차료를 받는 곳은 몇 군데에 지나지 않는다. 공인된 영수증이 없거나, 시간을 체크하지 않는 주차장은 다 저들처럼 눈먼 돈을 긁는 사람들이다. 우리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해수욕장은 재작년부터 갑자기 주차료를 받기 시작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누가 그런 결정을 했느냐고 따져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역 청년들이 고등학생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해 한철 장사를 하는 것이다.


또 멀쩡한 해변에 파라솔과 방갈로를 치고 고액의 임차료까지 챙긴다. 만약 관광객이 직접 가져온 돗자리나 그늘막을 사용하려고 하면 치지 못하게 막는다. 모두 불법이지만 그들을 제어할 규제가 마땅치 않다. 제주만 그런 것도 아니다. 남해, 동해, 서해, 또 많은 계곡들. 내가 찾았던 관광지는 다 그랬다. 지역 이권사업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노동이 투입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물을 어느 특정인이 소유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은 결코 단순하지 않아서 많은 경제학자들이 달라붙었으나 한 번도 해결된 적이 없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내려갔다. 바다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호이안 시가지로 향하는 다리를 건너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오르막에서 뒤뚱거릴 때마다 뒤에서 막내가 까르르 웃었다.      

안방비치의 파도소리

가내수공업

아내가 호이안에 온 이유엔 다른 목적도 있었다. 

호이안은 베트남 전통과 일본, 중국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는 도시다. 무역항으로 번성하던 16세기부터 도자기와 죽세공품, 왕골, 비단 등 가내수공업이 크게 발달했다. 도자기의 원료인 흙은 물론이고, 대나무, 왕골, 목화와 누에로 유명했다. 특히 일본과의 무역으로 양국 간에 문화교류가 활발했고, 왕래가 잦아 일본인 마을이 형성될 정도였다. 그 흔적으로 ‘내원교’라는 돌다리가 지금도 남아있다. 

'공예부흥'이라고 쓴 현판이 가게 중앙에 걸려있다.

손재주가 좋은 베트남인의 제품은 높은 값에 팔렸고 찾는 상인도 많았다. 투본강을 끼고 지금보다 큰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고, 주민 대다수가 무역업과 가내수공업에 종사했다.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온다. 관광객이 들끓는 큰길을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미로와 같은 작은 집들이 나타난다. 그곳에서 남자들은 왕골을 짜거나 등을 만들고, 나무에 목각을 한다. 여자들은 미싱을 돌리고, 실을 뽑고, 염색을 한다. 


그것들이 담을 넘어 밖으로 나와 상품이 되는데, 이 과정에서 몇 배의 유통마진이 생긴다. 그런 사실을 아는 아내는 관광객이 많은 길보다 좁은 골목을 찾아다니며, 수공업자들을 직접 만나 흥정한다. 발품을 팔아야 하지만 그렇게 거래를 하면 같은 제품을 많게는 매장의 반값에 살 수 있다. 수공업자들로서도 이익이다. 아내의 쇼핑 목록은 대개 그런 식으로 채워진 것들이다. 

자본과 유통이 노동보다 위에 군림하는 것에 거부감이 심한 아내는 생산자에게 정당한 이윤이 돌아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900달러짜리 나이키 신발을 만드는 아이들의 하루 임금이 1달러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아내는 공정한 룰에 의거하여 모두가 공정하게 이익을 나눠 갖는 사회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점에서 나보다 확실히 순진하다.   

  

담배

3박의 여행을 마치고 호치민으로 돌아오는 다낭공항에서였다. 대합실에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담배연기가 날아왔다. 흡연실 문이 열린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어떤 50대 중년의 남자가 대합실 한복판에서 떡하니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는 주변의 시선에 개의치 않았다. 또 공항 관계자 어느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가 담배를 다 피우고 꽁초를 화분 안에 비벼 끌 때까지 내가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더 심했다. 버스를 타면 승객과 운전사가 혼연일체가 되어 너구리를 잡았다. 담배를 태우는 택시운전사도 있었고 담배를 입에 물고 음식을 나르는 웨이터도 많았다. 음식물 위에 재를 뿌려 내놓는 일도 허다했다. 지금은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담배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다. 재떨이는 어디나 비치되어 있고, 길거리에서의 흡연도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공공장소를 제외하면 제약이 거의 없다. ‘필 수 있을 때 피우자.’가 그들의 태도를 보여준다. 


고등학생이 교문을 나서며 담배를 무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이고, 학교 앞 좌판에서 음료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학생도 여럿이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숨어서 피우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흡연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흡연에 대한 거부감이 우리보다 덜한 건 사실이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선 담배 값이 싸다. 베트남에 있는 동안, 담배 세 값을 샀다. 비싼 담배가 한화로 1,800원가량 했고, 싼 건 500원이었다. 단 돈 천 원이면 꽤 괜찮은 수입담배를 살 수 있었다. 마트처럼 지정된 판매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거리에 있는 간이매점에서 취급한다. 우리나라처럼 순한 담배를 선호하지 않아서 대체로 독한 담배가 많다. 그래서 한 대만 피워도 두세 대를 피운 효과가 있다.


금연정책은 보이지 않았다. 담뱃갑에 혐오 사진을 부착하지도 않았다. ‘피면 죽는다’는 문구가 있기는 했지만 살벌한 사진에 익숙한 내 눈엔 앙증맞은 애교에 불과했다. 


우리 집 아이들에게 흡연은 살인, 방화, 강도와 동급이다. 학교에서 얼마나 세뇌를 시켜놓았는지 흡연자를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줄 안다. 나는 아이들에게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전자담배로 바꾼 지금도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숨어서 몰래 피운다. 그래서 그토록 믿었던 아빠가 흡연자라는 사실을 알고 아이들이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둘째는 엉엉 울면서 아빠가 악의 소굴에서 어서 빠져나오기를 갈망했다. 이제 머리가 큰 녀석은 담배가 기호품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여전히 담배에 대한 저주를 멈추지 않는다. 세상에서 꼭 사라져야 할 것이 구구단과 담배다.     


호이안을 떠나면서 마지막이란 예감이 들었다. 이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기대했던 호이안만의 매력이 사라진 탓이었다. 더구나 저렴한 물가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였다. 그런데 호치민에 도착하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갈수만 있다면 바로 비행기를 돌리고 싶었다. 우버로 부른 택시를 기다리는 잠깐 사이,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됐고 가방을 멘 등은 축축했다. 긴 옷을 입어야 할 만큼 선선했던 호이안의 밤공기가 그리웠다. 아이들의 찡그린 얼굴에서 다시 30분 이동하고 1시간 충전하는 ‘30분 이동의 법칙’이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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