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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Sep 01. 2018

철병의 논리

제국주의에 저항한 작가들

순수냐, 참여냐, 논쟁을 떠나서 어떤 작가들은 선천적으로 1℃쯤 높은 피를 타고 난다. 그들은 현실에 안주해 편안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다. 늘 의심하고, 거부하고, 싸우고, 트집잡고, 집착하고, 채찍으로 몰아세운다. 그들은 달콤한 유혹에 굴복하는 사람이 아니다. 돈, 사랑, 명예 그 어떤 것으로도 잡아둘 수 없다.


지금 소개하려는 6명의 작가가 그랬다. 싸움의 현장엔 언제나 맹렬한 불기둥이 솟았다. 검은 연기가 삽시간에 하늘을 뒤덮었고 빛은 사라져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숨을 쉴 때마다 매캐한 가스가 가슴을 찔렀다. 그런 와중에 상대가 녹다운될 때까지 말싸움을 벌인 작가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투사보다 용맹하게 싸운 작가도 있었고, 관중 뒤에 숨어서 양쪽을 향해 비웃던 작가도 있었다. 누구는 팔다리를 잃었고, 누구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다. 목숨을 걸고 싸움의 현장 위를 날아다닌 작가도 있었다.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 같이 대항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 가난, 병, 이별, 죽음이 빚쟁이처럼 달라붙었다. 항상 반대 세력과 갈등했고, 테러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좌절이라는 단어의 뜻을 몰랐다. 극도로 애정하고 지나치리만치 무관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을 진정으로 사랑했다.


하워드 진

(Howard Zinn, 1922~2010)

사진출처 http://www.latimes.com

Thank you, Howard Zinn, for recognizing the beauty and power of culture, and for exalting the poet, the singer, the actor, the artist.

Thank you, Howard, for being kind enough to write your columns this last decade for a relatively obscure magazine called The Progressive, and for doing so with the utmost intelligence and grace.

Thank you, Howard, for calling me your editor.

Thank you, Howard, for your wry and self-deprecating sense of humor.     


‘고마워요, 하워드’로 시작하는 이 추모 글은 미국의 진보매체인 ‘Progressive’ 편집장 매튜 로스차일드가 2010년 하워드 진을 추모하면서 쓴 글의 일부이다. 이 글은 하워드 진이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명문이라 여기저기에 차∙인용되어왔다.


추모사 초반에 이런 부분이 있다.     

Thank you, Howard Zinn, for being there during the Vietnam War, for writing “The Logic of Withdrawal” and for going to Hanoi.

    

글에 나오듯이 하워드는 베트남 전쟁 중에 하노이에 갔었다. 그는 ‘철병의 논리’라는 책을 써서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맞섰다. 1967년의 일이다. 미국의 주류사회는 하워드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미국은 전투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우세했다. 만약 베트남에서 미국이 발을 뺀다면 득 보다 실이 컸다. 게다가 세계는 분명한 양극단이 존재하는 냉전시대였다. 반공주의자들이 그를 공격했다. 지식인들은 침묵했고 언론은 숨을 죽였다. 고작해야 ‘노옴 촘스키’나 1인 언론 창시자로 알려진 ‘이지 스톤’이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설 뿐이었다.


하워드에게 행동하지 않는 지식은 죽은 것이었다. 그에게 실천은 곧 학문의 본질이었다. 자서전격인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에서 그는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지식을 얻어가기보다 침묵함으로써 안락해지는 삶을 포기하고 정의롭지 못한 것에 당당하게 맞서 싸우기”를 갈망한다고 밝혔다.


젊은 시절 2차 대전에 폭격수로 참전했던 하워드는 자신이 떨어뜨린 폭탄에 희생된 민간인들의 참상을 알게 된 뒤 충격에 빠졌다. 그는 이를 ‘비참한 실수’였다고 고백했다. 그의 삶은 참회와 속죄의 연속이었다. 미국이 세계를 상대로 또 이런 비참한 실수를 범하지 말기를 간절히 호소했다. 그의 노력은 최근 이라크 전쟁에까지 이어졌다.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지가 적으로 변하는가 하면, 부득이 가치판단을 유보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때론 상대해야 할 적보다 동지의 지적이 더 아플 때도 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직시해야 하는 방향에서 고개를 돌린 적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누구보다 맨 앞에 서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지식인들이 권력에 아첨할 때, 탁자를 걷어치우고 일어섰다.


영화 ‘굿 윌 헌팅’의 로빈 윌리엄스가 분한 숀 맥과이어 선생이 하워드 진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화다. 주인공을 맡았던 배우 맷 데이먼은 하워드 진과 이웃해 살면서 그와 친분을 맺었고 직접 쓴 시나리오에 그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책 따위가 뭐라고 하건 상관하지 마. 넌 스스로 말해야 돼. 네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지. 그런데 넌 그렇게 하질 않는구나. 사람들이 손가락질할까 봐 겁내느라 말이지.”

     

앙드레 말로

(Andre Malraux, 1901~1976)

사진출처 https://www.architectes-aea.com

처음 프랑스에 갔을 때였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루아얄 궁전으로 걷다 우연히 ‘앙드레 말로’ 광장을 발견했다. 평범했던 공간이 갑자기 바뀌었다. 가로수, 분수대, 가로등, 보도블록, 지나가는 자전거, 엽서를 파는 노점상, 어느 것 하나 대수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각각 뭔가 알 수 없는 형태로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답을 내놓아야 할 것 같은 강박에 빠졌다. 그것은 일종의 사명감에 대한 시험대였다. 나는 한참 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서성였다. 그 경험은 내게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일으켰다.


말로는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다. 젊은 시절, 대입에 실패한 그는 진학을 포기하고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당시 프랑스령인 인도차이나로 여행을 떠난다. 젊은 날의 호기였을까? 그는 그곳에서 엉뚱한 범죄를 저지른다. 크메르 유적 도굴 혐의로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된 것이다. 감옥에 있으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말로는 서구사회가 동양을 상대로 어떤 횡포를 저질렀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감옥에서 나온 말로는 마치 평생의 신념처럼 사이공으로 향한다. 그는 베트남 해방 운동가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랭도쉰(L'Indochine)’이라는 신문을 만들어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반제국주의 투쟁을 선포한다. 하루가 멀다고 매일 날 선 비판을 쏟아내자, 정부는 두고 보지 않았다. 창간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그의 신문은 폐간되었다.


현실의 두꺼운 벽 앞에서 말로는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그것이 작품 집필에 몰두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앉아 글만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에너지를 쏟아내기에 펜촉은 너무나 얇았다. 많은 작품을 쓰면서 명성을 쌓은 말로는 다시 현실 참여로 눈을 돌린다. 1936년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가하고, 1940년에는 전차병으로 2차 세계대전에 지원하였다. 전쟁 포로가 되었고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으며, 1944년에는 다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종전 후, 드골의 신임을 얻은 말로는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문화 강대국의 기틀을 다진다. 후문에 의하면 베트남에서 미국이 물러났을 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실제 그는 베트남이 통일되고 1년 뒤에 눈을 감는다.    

  

생텍쥐페리

(Antonie de Saint-Exupéry, 1900~1944)

사진출처 http://coupe-antoine-de-saint-exupery.com

말로가 행동주의자라면 생텍쥐페리는 타고난 모험가에 이상주의자였고, 꿈꾸는 몽상가였다. 정치적 행로도 달라 생텍쥐페리는 드골에 반대하는 친미 성향이었다. 그는 저항하기보다 자유를 추구하는 스타일이었다. 실제로 독일 강점시기에 조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사람들이 그의 변절을 손가락질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뭔가에 얽매여 자유의지를 속박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목숨을 건 모험만이 인간의 소명을 가장 숭고하게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도 베트남과 인연이 있었다. 궁핍했던 시절, 신문에 실린 광고에 그는 눈을 번쩍 떴다. 파리에서 사이공까지 비행하는 대회가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상금이었다. 47시간 안에만 주파하면 되었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그 무모함이야말로 그를 매료시키는 힘이었다. 운명은 도전하는 자의 것이다.


부푼 꿈을 안고 비행대회에 참가한 그는 리비아 사막에 추락한다. 거의 출발하자마자였다. 그는 좌절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헤매는 5일 동안에도 자연에 대항하는 인간의 의지를 실험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극적으로 구조된 생텍쥐페리는 당시의 생생한 경험을 토대로 작품을 써, 그 작품으로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수상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창작에 몰두한 그는 타고난 모험가와 승부사 기질로 금세 유명인사가 된다. 특히 ‘어린 왕자’의 성공은 이루 헤아리기 힘든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어린 왕자의 집필이 히치콕의 독려 때문이었다는 설과 어린 왕자가 어린 시절에 죽은 동생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생텍쥐페리의 관심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는 툭하면 비행기를 몰고 나가 사고를 내거나 당했다. 마치 도박처럼 죽음에 대항해 누가 이기는지 승부를 가리는 사람 같았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치닫던 1944년 어느 날, 미군부대 소속으로 정찰을 나갔던 그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추측만 무성하던 그의 실종은 최근에 와서야 독일군에 의해 코르시카 상공에서 추락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영원히 어린 왕자로 바다에 묻혔다.     


보리스 비엥

(Boris Vian, 1920~1959)

사진출처 http://www.letterpressproject.co.uk

우리에게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J'irai cracher sur vos tombes)’라는 작품의 제목이 이름보다 더 유명하다. 주로 하드보일드 계열의 스릴러 소설을 썼다. 몇 작품은 꽤 팔렸으나, 대부분 폭력적이고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평단과 독자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절치부심하며 낸 연애소설 역시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는 인기에 영합하는 동료 문인들을 조롱하고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야유를 보냈다.      


보리스 비엥의 이름은 오히려 음악계에 더 알려져 있었다. 오래전부터 재즈 트럼펫 연주자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의 주 무대는 파리의 생 제르맹 데 프레의 ‘타부 (Tabou)’라는 클럽이었다. 스스로도 재즈 팬이기도 한 비엥은 ‘듀크 엘링턴’과 ‘마일스 데이비스’ 등과 친분을 쌓았고, 재즈 잡지(‘르 재즈 오트’, ‘파리 재즈’)에 음악평론을 기고했다. 그러나 백인 재즈 아티스트를 공격하고 흑인 재즈 아티스트를 옹호하는 그의 성향 때문에 잦은 마찰이 일었다.


그는 반전 노래인 ‘탈영병 (Le Déserteur)’의 작사가로도 유명했다. 사람들 사이에 널리 애창되는 노래였지만 방송이 금지된 곡이었다. 입영 거부를 선동하는 내용과 베트남 참전에 대한 항의가 담겨있다는 이유였다. 이 노래가 발표되었을 시점이 프랑스가 베트남 디엔비엔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특히 마지막 가사가 문제였다.


‘당신이 나는 쫓겠거든 헌병한테 미리 알려줘.

내가 무기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잘 쏠 줄도 안다는 사실을.’


그는 생애만큼이나 죽음도 조롱과 야유가 넘쳐났다. 그의 소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가 영화화되어 시사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극장 뒷자리에 앉아있던 그는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비아냥거렸다. 얼마나 독설을 퍼부었는지 제작자와 감독이 자리를 피해 일어설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잠을 자듯 눈을 감았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는 잠에서 깨지 못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Marguerite Duras, 1914~1996)

사진출처 http://womanns-world.com/marguerite-duras-douleur/

마르그리트는 영화 ‘연인’으로 알려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사이공에서 태어나,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뒤라스의 삶은 프랑스의 근현대사를 그대로 빼닮았다. 파시즘과 식민주의로 점철된 베트남에서의 어린 시절은 말없고 소심한 소녀를 문학의 세계로 이끌었다.


작고 연약한 소녀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17세 때 본국으로 돌아가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법률과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공산당원이 된 그녀는 2차 대전 중에 미테랑과 함께 레지스탕스에 가담하는가 하면, 국제 전쟁 포로 해방 기구에서 활동가로도 활약한다. 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운동을 이끌었고 드골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는 투사였다. 인권 옹호자였고, 페미니스트였으며, 항상 노동자의 편에서 목소리를 내는 대변인이었다. 사람들은 가녀린 그녀의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궁금했다.


겉모습과 달리 그녀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 아이와 오빠를 잃은 충격으로 죽는 날까지 알코올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매일 2리터가 넘는 와인을 마시면서 오로지 글쓰기에 매달렸다. 이혼과 절망, 죽음 사이를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창작뿐이었다. 50여 년에 걸쳐 70편에 달하는 작품을 발표할 만큼 왕성한 창작욕은 어쩌면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치열한 몸부림이었다. 장 콕토상, 공쿠르상, 헤밍웨이상 등을 수상했고, 죽는 날까지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거론되었다.


그녀는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다.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하거나, 영화 자체를 위한 각본을 집필하고 연출하는가 하면, 영화가 소설 속에 삽입되고, 소설이 다시 영화로 각색하는 등 두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끊임없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법을 써 내려갔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불태우다, 1996년 35세 연하의 연인 옆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다. 소진된 그녀의 몸은 잘 마른 숯처럼 가벼웠다.

 

월터 딘 마이어스

(Walter Dean Myers, 1937∼2014)

사진출처 http://www.wunc.org

아동문학가 월터 딘 마이어스를 알게 된 건 대학원 수업에서였다. 그의 책인 ‘소년 정찰병’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의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게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한 문장 안에 서로 다른 시각을 배치시키는 힘이 탁월했다.


어린 시절을 할렘에서 보낸 마이어스는 고등학교를 중퇴하자마자, 17살의 어린 나이에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그때 겪은 일을 그림책으로 만든 것이 바로 ‘소년 정찰병’이었다. 책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보다 17살 흑인 소년의 시각을 통해 적과의 긴장국면을  묘사하는 방법으로 전쟁의 실상을 전한다.


그에게 매료된 나는 그의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흑인소년이 교도소에서 겪은 일을 다루는 ‘몬스터’가 있었다. 원문을 헤치지 않는 범위에서 옮겨보면 이렇다.


울기 좋은 때는 밤이다. 불이 꺼지고, 누군가가 두들겨 맞으면서 살려달라고 악을 쓰는 밤에는 코를 조금 훌쩍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내가 운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불이 켜지고 두들겨 맞는 사람은 내가  것이다.’


몇 문장만으로 사람을 사로잡는 그가 평전을 썼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942~2016)의 평전이었다. 읽어보지 않고 배길 수 없었다. 월터는 1960년 TV를 통해 무하마드 알리를 처음 보았다. 로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 위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한순간에 이 흑인 소년은 알리에게 영혼을 빼앗겼다. 그 뒤로 그는 알리가 어떻게 역경과 싸우는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을 알리의 평전으로 마무리했다.


백인 동네로 이사하지도, 백인 여자와 결혼도, 백인들이 원하는 챔피언도 되지는 않겠다고 알리는 선언했다. 그는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했으며, 또한 베트남 징집을 거부해 챔피언 벨트를 반납했다. 세 번의 결혼과 혼외 자식의 문제로 파산을 반복했다. 그래도 그는 ‘루이빌의 떠벌이’이라는 별명처럼 한 번도 인생에서 웃음을 잃은 적이 없었다. 그는 트래시 토커(Trash Talk)로 유명했다. 링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상대방을 자극하며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현재의 래퍼처럼 라임의 구성과 ‘스포큰 워드’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그가 위트와 은유, 비유, 상징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었던 건 어릴 때부터 시를 즐겨 암송한 결과였다. 혼자 있을 때에도 알리는 시를 외느라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는 말이 그냥 툭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다. 알리는 어느 사석에서 자신의 몸을 만든 건 권투였지만, 정신을 만든 건 시였다고 고백했다.(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작가 월터는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였고, 작품의 주인공은 신념과 종교적 양심에 따라 징집을 거부하고 반전시위에 가담했다. 알리가 자신을 괴롭히는 파킨슨병과 투병하는 중에, 그의 평전을 쓴 작가가 먼저 세상이라는 링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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