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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Sep 08. 2018

노틀담 성당과
중앙우체국

성모마리아 성당과 우체국은 신혼의 추억이 가장 많이 깃든 곳이다. 우리가 자주 가던 단골집은 대개 그 부근이거나 그곳을 거쳐 지나가야 했다. 은행, 카페, 식당, 상점 등과 가까웠고, 당시로선 가장 번듯한 백화점인 다이아몬드 플라자와도 멀지 않았다.


제일 먼저 찾아갔어도 시원치 않았는데, 어쩐 일인지 그쪽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코앞까지 갔다가 멀리서 성당의 첨탑만 보고 다른 길로 빠지곤 했다. 아내와 나는 여행 막바지에 이르러, 비로소 그곳으로 향했다. 


처음 노틀담 성당을 보았을 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신혼여행으로 유럽을 다녀온 직후라, 파리의 노틀담과 오르세 미술관을 흉내 냈다는 것 자체에 흥미를 잃었다. 은행에 볼일이 있어 HSBC와 조흥비나를 오갈 때도, 우체국에 들러 소포를 보내거나 국제전화를 걸 때도 성당과 우체국의 외관을 눈여겨본 일이 없었다.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결벽성은 내 눈과 귀를 가렸다. 프랑스 식민시대에 세워진 다른 건물들이 워낙 많아서 굳이 건물의 역사성을 따질 이유가 없었다. 

1910년대 사이공 거리
2018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 100년의 시차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체국에 들어가 서울로 전화를 걸고 나오던 참이었다. 한 노인이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담배를 한 가치 달라고 했다. 거리에서 그런 요구를 받았다면 응당 본체만체 했겠지만 우체국 안에서는 피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노인의 차림새와 태도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매우 예의 바르고 정중한 사람처럼 보였다.


당시 우체국 안에서의 흡연은 자연스러웠다. 내가 담배에 불을 붙여주자, 노인은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가 우체국의 높은 천정을 향해 가늘고 길게 품었다. 그는 나에게 뭔가 계속 말을 붙이고 싶은 눈치였다. 내게 혹시 프랑스어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영어도 못하는데 프랑스어를 할 턱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어가 짧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짧은 영어로 자신이 우체국에서 근무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밝혔다. 


어림잡아 노인의 나이는 80대 안팎으로 보였다. 그는 식민지 막바지에 일을 시작했다. 우체국에서 무슨 업무를 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레이트’란 단어가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공중을 에워싼 후덥지근한 공기에 갇혀 한참 그의 얘기를 들었다. 반은 날려버리고 반만 어렴풋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추론하여 종합하면 그의 삶은 이랬다. 어려서부터 우체국은 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용케도 일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젊은 시절 앞뒤 안 가리고 열심히 일했다.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다. 혼란의 시대였지만 낭만이 있었고 자부심도 대단했다. 프랑스가 물러나고 통일이 되자,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직장을 잃었다.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쫓기듯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하루도 이곳을 잊은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출가하고 이제 혼자되어 예전의 사이공으로 돌아왔다. 거의 매일 우체국에 온다. 자신은 아내가 묻힌 미국보다 이곳에서 죽고 싶다.


노인의 맑은 눈동자에 간절함이 어른거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지만 어쩐지 그냥 떠날 수 없었다. 노인에게 담배와 라이터를 쥐어주었다. 그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나는 억지로 떠넘겼다. 그가 사례를 하려고 돈을 꺼냈다. 나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돌아보니 노인의 눈이 나를 쫓고 있었다. 두꺼운 안경 너머에 회한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있었다.


어릴 적 보았던 베트남 보트피플의 사진이 떠올랐다. 반공 이데올로기로 쓰였던 그 사진 속 어딘가에 젊은 날의 노인이 앉아있을 것 같았다. 밖으로 나와 본 우체국은 이전에 내가 보았던 곳이 아니었다. 어떻게 건물을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곳을 지나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그물처럼 나를 옭아매었다. 


그 후로 그 노인을 멀리서 딱 한 번 보았다. 더운 날 그는 모자도 쓰지 않고 우체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살짝 굽은 등이 애처로웠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중앙우체국은 1886년 건설을 시작하여 1891년에 완공되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최초의 우편·전화 시설이었다. 기초 철골 설계는 에펠탑을 만든 ‘구스타브 에펠’이 했고, 건축은 ‘외기스트 앙리 빌드외’와 ‘알프레드 폴혼’이 담당했다. 이미 말한 대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을 모델로 했다. 완공 당시 메콩강의 탐험 지도와 사이공의 옛 지도가 벽에 그려져 있다. 

19세기에 제작된 지도, 1군 몇몇 지역을 빼고는 다 논이다.


저 부스 안에 들어가 전화를 걸곤했다. 도쿄, 베이징, 서울의 시차가 재밌다.

같은 선상에 있는 노틀담 성당은 그보다 빠른 1880년에 세워졌다. 이끼와 곰팡이가 끼지 않도록 특별 제작된 벽돌과 타일을 마르세이유에서 공수해서 만들었다.(바닥 타일을 자세히 보면 ‘Guichard Carvin, Marseille St André France’라고 새겨져 있는 중간에 ‘Wang-Tai Saigon’라고 적힌 다른 타일이 섞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깨진 조각을 수리하기 위해 사이공에서 생산되었다는 뜻이다.)

노틀담성당의 변화

1895년에 종탑을 올렸고, 28톤에 달하는 청동으로 만든 종을 설치했다. 또한 탑 꼭대기에 무게 600kg의 십자가를 세워, 지면에서 꼭대기까지의 전체 높이가 60m에 이르는 지금의 큰 건축물이 되었다.


호치민 시민들에게 있어 이 두 건축물은 단순히 종교시설과 우체국 이상의 가치가 있다. 평일에는 웨딩촬영을 하는 신랑 신부들을 볼 수 있고, 주일 오전에는 종교가 없는 사람까지 몰려든다. 물론 관광객을 쫓아온 잡상인이 대부분이지만 그만큼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다.


이번에 가보니 노틀담 성당은 외벽을 보수 중이었고, 중앙우체국은 관광 상품 판매소가 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유치원 현장학습이 아니고서야 누가 우체국에 가겠는가. 우체국과 성당을 들러보고 나오는 길에 비트코인과 관련된 광고판이 보였다. 세계적 광풍이라더니 베트남도 피해가지 못하는 듯했다. 13년 전의 베트남과는 격세지감이었다. 


‘Pasteur’로 가기 위해 ‘công xã Paris’(길 이름에 파리 코뮌을 붙이는 낭만이라니!)을 건너다가, 광장 한 구석에서 놀고 있는 비둘기 떼를 만났다. 그건 그때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비둘기들은 모이를 쫓아 무서운 줄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세계 각국의 아이들이 다 모여들었다. 아이들에게 발목이 붙잡힌 부모들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나는 우체국에서 만나 잠시 대화를 나눴던 노인을 떠올렸다. 식민지에서 태어나 제3국으로 떠나야 했던 그가 통일된 고국에서 보낸 말년이 과연 행복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졌기를 갈망했다. 비둘기도 태어나 자란 곳에 묻히는데, 인간이 그럴 수 없다면 그 역시 비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돌아보니, 그 자리에 성당과 우체국이 묵묵히 서있었다. 사연을 만드는 것도, 그것을 말하는 것도 사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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