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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Sep 15. 2018

베트남을 떠나며

아이 셋과 여행한다는 것은

아이 셋을 데리고 여행을 하는 건 수양의 과정이다. 몸을 닦고, 정신을 닦고, 마음을 닦고, 그릇을 닦고, 이를 닦고, 신발을 닦고, 닦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닦다가 마침내 눈물을 닦는다. 그런데도 결코 반짝반짝 빛나지 않는다. 어딘가 얼룩은 늘 남아있다.


아이들은 여행의 매 순간이 타자와의 피나는 갈등과 험난한 극복의 과정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건 아이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나와 아이들 관계에도 해당된다.


대화하고, 설득하고, 협력하는 것이 싸우고, 소리 지르고, 경쟁하는 것보다 낫다는 건 막내 아이도 안다. 단지 그 절차가 귀찮고 복잡할 따름이다. 나는 아이 하나하나의 의견을 듣고 수렴하는 과정을 거치려고 노력하지만 현실은 복잡하다. 아이들은 모두 같이 하려는 습성이 있다. 누가 화장실을 가면 쪼르르 따라간다. 한 명이 책을 보면 그 책에 셋이 달라붙는다. 물도 똑같이 마시고 간식도 똑같은 양으로 먹는다.


세 아이가 장난감 하나를 두고 싸우고 있을 때, 자체적으로 타협점을 찾을 것이란 기대는 환상이다. 하루 뒤면 어디에 처박힐지 모를 그 장난감이 그 순간만큼은 남북정상회의보다 더 중대한 사안이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온갖 전략과 전술을 펼친다. 첫째는 힘의 우위로, 둘째는 모략으로, 셋째는 피해자 코스프레로 생존을 모색한다. 아이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거짓말쟁이이며, 뛰어난 연기자다.


나는 아이가 생긴 후로 순자의 성악설을 믿게 됐다. 더불어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치졸한 인간인지 깨달았다.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는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니 마음이라도 편했다. 이제 큰애는 예전처럼 고집을 부리지 않지만, 둘째는 여전히 밤송이처럼 단단하고, 막내는 이제 막 가시가 자라나고 있다.


아이들은 비행기 탈 때부터 서로 창문 쪽 좌석에 앉겠다고 다퉜다. 오는 길, 가는 길 나누고 순서를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건 여행 내내 계속되었다. 서울 나들이를 했던 지난여름의 악몽이 되풀이됐다. 호텔에 들어가면 어디에 누울까를 두고, 어느 식당에 가는가를 두고, 식당 안에서는 무엇을 먹는지를 두고, 또 TV의 선택권을 두고, 누가 화장실에 먼저 가는지를 두고, 매번 타협과 윽박과 소란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우리 집 아이들의 성향이었다. 또래를 키우는 다른 집 사정을 들어보면 아이들 각자의 개성이 워낙 달라 어떤 아이는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아이는 나가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또 어떤 아이는 고기만 고집하고, 어떤 아이는 야채만 먹는다. 그에 반해 우리 집 아이들은 모두 나가는 걸 좋아한다. 먹는 건 입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된다. 비슷한 성향이라 애초의 시작은 사이가 좋다. 웃으면서 떠난 길이 울면서 돌아오는 것이 문제다.


여행 초반에 막내에게 감기가 왔다. 추운 나라에서 갑자기 더운 나라로 이동하려니 몸이 적응하지 못한 탓이었다. 막내에 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못마땅한 둘째가 징징거렸다. 원인은 하나인데 증상이 많았다. 다리가 아프다, 머리가 어지럽다, 속이 메스껍다. 이럴 때 내가 쓰는 수법은 다른 아이들 몰래 사탕이나 초콜릿을 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것을 비교로써 인지한다. 큰애는 머리가 커서 더 이상 사탕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한 명의 어른으로 대접받는 것을 좋아한다. 식당에서 당당한 1인분을, 아빠와 같은 크기의 자전거를, 집수리를 할 때는 한 명의 노동력으로 존중받기를 원한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큰애에게 가방을 맡겼다. 평소 덜렁거리고 칠칠치 못하게 흘리고 다니는 큰애는 여행하는 동안 캐리어와 작은 백팩을 제 몸처럼 소중하게 다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아이와 여행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아이들의 몸과 입을 통해서 전달된 세상은 환상적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경험과 풍경이 아이들을 통해 전이되면 새로운 경지가 열렸다. 물론 그 감정이 오래가지 않고 분노로 바뀔 때가 많았지만 가끔 전율이 올 때도 있었다. 


호이안의 인적 없는 길을 자전거로 달리던 맏이가 “아빠,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간 것 같아.” 했을 때, 정말 16세기로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호텔 옥상 수영장에서 둘째가 수영을 하다 말고 “아빠, 새처럼 나는 것 같지?” 했을 땐, 진짜 하늘 위를 둘째 녀석이 날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째를 처음 먹은 막내가 “이 개구리 알 진짜 맛있네.” 하고 감탄했을 땐 마치 개구리가 입 안에서 부화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100년 전 사이공강
2018년 현재 사이공강

시작

여러 부담을 안고 여행을 떠났던 건 순전히 아내 때문이었다. 지난해 가을, 아내가 뜬금없이 베트남 여행 얘기를 꺼냈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호치민에서 보냈던 신혼 얘기를 종종 나누곤 했다. 지금보다 젊었고, 사이도 좋을 때였다. 무엇보다 우리에겐 아이들이 없었다. 자유롭다 못해 따분하기까지 했다. 


지나간 시절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어쩐 일인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내는 “여행 경비가 얼마나 나올까?” 했다.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넘어오는 산길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힐끔 눈치를 보니 아내의 눈이 구름에 가려진 한라산 영실 쪽을 향하고 있었다. 시선 끝에 오묘한 감정 변화가 읽혔다. 구불구불한 길만큼이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여행경비는 천차만별이라, 정해진 금액이 없다. 지나가는 말로 한 번 알아보겠다고 대꾸하고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기간과 숙소, 식사가 관건이었다. 비행기 삯과 최소한의 숙소를 고려해도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우리에겐 세 명의 어린 새끼가 딸려 있다. 


최저로 뽑은 액수에 아내는 며칠 고심하는가 싶더니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 않아도 될 프로젝트를 억지로 맡아서 근 석 달간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경비를 마련했다. 악착같은 아내 옆에서 나는 숨도 쉬지 않았다.


목돈이 생기자, 구체적인 여행 계획에 들어갔다. 아이들의 겨울방학을 틈타 다녀오기로 했다. 기간은 무료 비자가 가능한 15일로 잡았다. 저가 항공사의 티켓은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였으나 우리는 다섯 식구였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반값에 태워주는 항공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온갖 가격비교 사이트를 검색했다. 여행 기간보다 검색 기간이 더 길었다. 적정한 가격에 비행기 티켓을 끊고 나니, 여권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한 푼이라도 아낄 요량으로 사진을 직접 찍어서 시청에 가져갔다. 나와 아이 둘이 퇴짜를 맞았다. 나는 한 쪽 귀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둘째는 눈썹이 머리카락에 가렸다는 이유로, 첫째는 한쪽 눈썹과 귀가 잘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머리를 자르고 귀 뒤에 휴지를 박아 나귀처럼 팔랑 귀로 만든 다음, 다시 사진을 찍고, 또 1주일 기다렸다. 


여권이 나오는 동안 호텔을 알아보았다. 예전엔 여행지에서 직접 호텔을 물색했다. 지나가다 아내가 호텔을 지목하면 나는 마당쇠처럼 얼른 뛰어 들어가 객실 상태와 가격을 알아보았다. 빈 객실이 없을 때도 있었지만 현지에서 호텔을 찾으면 좋은 점이 많았다. 직접 객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청소상태나 침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가격도 흥정이 가능하다. 운이 좋으면 절반에 미치지 않는 가격으로 투숙할 수 있었다. 또 난 그런 일에 제법 재능이 있어서 매니저와 흥정하길 좋아했다.


그러다 된통 당한 기억이 있다. 붕타우에 갔을 때였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은 우리는 그 넓고 긴(세계에서 몇 손가락에 꼽히는) 붕타우의 해변을 끝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몹시 더운 날이었고 가방은 무거웠다. 모든 호텔이 만원이었다. 돈을 더 얹어주겠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토록 많은 호텔이 전부 꽉 찼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주말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 문제였다. 붕타우는 호치민 시민들에게도 최적의 휴양지였다. 자정이 가까이 돼서야 우리는 해변에 인접한 민박집을 구해서 간신히 몸을 눕힐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세 시간 만에 우리는 다시 일어나야 했다. 새벽 3시부터 해변으로 몰려드는 관광객과 오토바이 소리에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변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알고 보니 붕타우는 햇빛이 강해 낮에는 물놀이를 할 수 없고, 새벽과 밤에만 해변을 개방했다. 우리는 해변에 나란히 누워, 뜨겁게 떠오르는 태양을 억지로 즐기면서 남은 잠을 청했다.


아이들과는 그럴 수 없었다. 호텔 예약사이트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평점 위주로 호텔을 찾았다. 가격이 문제였다. 어디나 최대 네 명이 한 가족이었다. 다섯은 가족이 아니라, 집단, 혹은 단체였다. 초등학교에 입학도 하지 않은 막내를 성인으로 간주했다. 도미토리 룸을 통째로 빌려주겠다는 곳도 있었다. 아이를 하나 두고 오던지 아니면 단체 방을 예약하라는 뜻이었다. 심지어 2개의 방을 잡으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다섯 식구의 조건을 맞추다 보니, 괜찮은 호텔이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남은 중에서 싸고, 좋고, 넓고, 깨끗한 호텔을 최대한 구하는 것이 아빠의 임무이자 능력이었다. 그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나는 호치민을 꿰뚫고 있었다. 위치별로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해주고 싶은 욕심이 컸다. 아는 만큼 고생이었다.


2주가 흐르자, 호치민에 있는 모든 호텔을 다 외울 정도가 되었다. 이름만 대면 위치와 가격, 평점과 부대시설에 대한 평가가 입에서 술술 튀어나왔다. 재밌는 것은 같은 사이트, 같은 호텔이라도 검색 시간대와 날짜에 따라 가격 변동이 심했다. 또 수시로 특가와 시간대 할인 같은 이벤트가 등장해서 하룻밤 사이에 몇 만 원의 돈이 오락가락했다. 나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갔다.


결국 15일의 숙박 중 7일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미룬 채로 나는 좀비처럼 비행기에 올라탔다.  

    


다시

아이들에게 베트남은 고향처럼 친숙한 곳이다. 우리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베트남에 관련된 얘기를 숱하게 들으면서 자랐다. 집에 베트남에서 가져온 가구와 물건이 적지 않고, 엄마 친구들(이모라고 부르는) 중에 베트남 사람도 있다. 베트남 음식을 집에서 해 먹고 음식점에도 자주 간다. 그래서 둘째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엄마가 베트남 사람인 줄 알았다. 한 번은 유치원 교사가 아내를 불러 다문화가정에 대한 혜택을 설명했다. 어쩜 그리 한국말을 잘하냐면서. 


베트남은 여전했고 달랐다. 고층 건물이 들어섰고 옛 거리는 그대로였다. 사라진 음식이 있는가 하면 새로 생긴 음식도 있었다. 노상방뇨와 오토바이, 낮잠과 씨클로, 더럽고 복잡한 곳에 무심함과 여유가 차고 넘쳤다. 걱정했던 것보다 ‘베트남스러운 것’이 많이 남아있어서 좋았다.


15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아쉬움은 항상 따라다닌다. 돌아오는 길에 공항 대기실에서 아내가 말했다.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13년 전 나눴던 대화의 반복이었다. 다시 10년 뒤에 또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들었다. 이룩하는 비행기 안에서 괜스레 눈이 뜨거워졌다.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아이들이 훌쩍 자란 것이 눈에 보인다. 지도를 펴놓고 막내가 묻는다. 다음엔 어느 나라에 갈 거야? 그리고 자기들끼리 그리스, 호주, 파리, 스페인, 네덜란드 해가며 지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투닥거린다. 


좋다. 다 가자. 그렇게 말하면서 아내의 눈치를 본다. 여행은 경험을 통해 추억을 쌓는 과정이다. 아이들에게 장난감 하나 사주는 것보다 경험을 함께 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다만 장난감이 훨씬 싸다는 것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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