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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Mar 30. 2019

무인도에 가져갈 한 권의 책

축구란 무엇인가

서로 작당이나 한 것처럼 어느 잡지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설문이 있다. 무인도로 시작하는 그 질문의 요지는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이런 식의 질문이 어리석은 줄 알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하고, 나라면 어떻게 할까 상상하는 재미도 있어서 찾아 읽게 된다. 


나에게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도구를 제외하고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 책이다. 물론 음악이나 영화를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넷플릭스가 끊기지 않고 나오는 무인도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만, 무한정의 전기와 플레이를 재생할 매체의 제공 여부가 요원한 상황에서는 환상일 뿐이다. 책은 조도만 해결된다면 특별한 제약이 없다.


문제는 어떤 책을 고르느냐다. 장식할 이유가 없으니 질은 당연히 안될 터이고, 대하소설이나, 연작 시리즈도 여러 권을 챙겨야 하니 선택권에서 벗어난다. 추리고 추려서 남은 책이 대략 대여섯 권이다. 바닥에 내려놓고 쪼그려 앉아 한 권씩 본다. 어루만지고, 펼쳐보고, 여백에 썼던 낙서를 훑는다. 손때 묻은 낡은 표지와 섬세하고 미려한 활자, 동맥처럼 뛰는 문장과 행간들, 그 거대한 공간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사유의 시간들. 세상일이란 게 참 묘해서 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게 더 빠를 때가 있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같은 기준이 다르게 적용되고, 다른 기준이 똑같이 적용되는 불합리한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나는 책을 고른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건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와 바우젠바인의 <축구란 무엇인가>이다. 두 권을 앞에 두고 망설인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느 것을 버릴 것인가?’보다,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는 것이 좋다. 섬이라는 특수한 조건, 나 혼자라는 특수한 상황, 무엇이 나타날 줄 모르는 특수한 불안 속에서… 나는 미술이 아닌 축구 쪽에 손을 든다.


이 책을 한 번에 쭉 읽은 적은 없다. 손에 잡히는 대로 펼쳐서 조금씩 끊어 읽었다. 어디는 그냥 넘어가고 어느 챕터는 서른 번을 넘게 읽었다. 글 자체가 흥미롭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상상할 여백이 많다. 내가 보는 좋은 책의 기준은 얼마나 독자와 소통을 하는가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매 장마다 독자와 화려한 축구경기를 펼친다. 특히 우리말로 옮긴 김태희(배우 김태희보다 멋진 분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번역가의 문장은 나를 압도한다. 그의 드리블을 보고 있으면 숨이 턱 막혀서 나도 모르게 감탄이 난다. 대개 좋은 번역서는 원서가 궁금한 법이지만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책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원서를 읽고 실망할까 봐 겁이 난다.

이 책은 나의 궁금증을 해결한 도구다. 왜 어릴 때부터 둥근 것만 보면 발로 차고 싶어 했는지, 우유팩이나 요구르트병 따위를 찌그려서 친구와 신발 밑창이 다 닿도록 좁은 골목을 누볐는지, 엄마한테 뒤지게 맞을 줄 알면서도 기어이 비 오는 날 진흙탕을 뒹굴었는지, 백여 명의 군인이 한 연병장에서 공 3개를 놓고 집단 난투극을 벌였는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누구보다 먼저 지랄 옆차기를 날렸는지, 새벽 축구 생중계를 보고 만원 버스에 서서 졸다가 마침내 쓰러졌는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조기축구회원 모집 공고만 보면 가슴이 설레는지 알게 된다.


이 책은 나의 미래를 예측하는 도구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를 사귀고, 누구와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해 알려준다. 이를테면 브라질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여자를 바꾸는 놈과는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클럽을 바꾸는 놈과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 이른바 ‘축구 정신’은 세상의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된다. 혹시 알까? 무인도에 남자(식인종을 포함해서)가 나타난다면, -여자가 나타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와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모르긴 몰라도 축구를 하게 될 것 같다. 축구는 대화가 필요 없다. 룰이 간단해서 분쟁의 소지가 거의 없다.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행위로써 제일 빠르게 신뢰를 쌓을 수 있는 도구다. 내가 아는 분 중에는 조기축구회에서 뛰다가 한 회장님 눈에 들어 중견기업 이사 자리에 오른 경우도 있다. 영화 <지중해>에서도 섬에 갇힌 군인들이 하는 일은 결국 축구다.


이 책은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알려주는 도구다. 좌익과 우익의 이념과 가치, 자본과 미디어의 변화에 따른 역사적 통찰,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는 이유, 인구의 증가와 감소에 대한 시장의 변화, 난민, 성 소수자, 장애의 편견, 정치 뒤에 숨은 이데올로기의 핵심, 세상을 움직이는 룰에 관한 관점 등 우리가 알거나, 혹은 모르거나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축구에 빗대어 설명한다. 마치 지구가 거대한 축구공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처럼.


▶어느 술자리에서건 발언의 주도권을 가지고 싶다면 이 책을 응용하는 것이 좋다. 내 경험상, 대상이 여자만 아니라면, 이미 술에 취해 혀만 꼬부라지지 않았다면, 당신이 그 술자리의 핵심이 될 수 있다. 다만 지나치게 화려한 플레이를 벌이다가 술값까지 계산해야 하는 처지가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혼자만 앞서 달리는 것은 위험하다. 어디선가 계산서가 날아온다면 과감하게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 그러라고 패스가 있는 것이다. 또한 당신이 축구에 관심이 없는 여자라고 해도 이 책의 가치는 유용하다. 어째서 세상의 절반이 크고 둥근 것만 보면 환장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막힌 이야기들이 도처에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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