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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Apr 06. 2019

땀과 기름때로 얼룩진 이름

지포 라이터

인간이 불을 다루게 된 이래, 보다 간편하고, 보다 안전하며, 보다 오랫동안 유지하는 방법은 인류의 오랜 과제였다. 더불어 이동할 때에도 어떻게 휴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었다. 뛰어난 성능의 화포를 가지고도 불을 붙이지 못해 패망한 나라가 한둘이 아니고, 저녁밥 지으려다 국토 전체를 홀라당 태워 먹어 지도에서 사라진 왕국도 적지 않다. 1680년,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이 나무 막대기 끝에 유황을 씌운 다음, 표면을 인으로 처리한 종이에 그어 불씨를 일으키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성냥을 만들어 내기까지 참으로 험난하고 눈물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로부터 200년이 훌쩍 넘은 1931년, 미국 펜실베니아에 살던 조지 블레이스델(George G. Blaisdell)은 어느 날 집에 놀러 온 친구와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담배를 피우기 위해 2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날따라 라이터가 말을 듣지 않아, 두 사람은 담배가 침에 흐물거릴 때까지 물고 있어야 했다. 최초의 라이터로 알려진 ‘임코’는 담배를 꼬나물기 시작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시쳇말로 가장 핫한 아이템이었다. 탄피를 개조해 만든 몸체에, 뚜껑에 달린 부싯돌을 이용하여 심지에 불을 붙이는 방식인 임코의 모토는 ‘언제 어디라도’였다. 웬만한 바람으로는 꺼지지 않아 일명 ‘방풍 라이터’라고 불렸다. 


그런 임코는 허점이 많았다. 두 손으로 조작해야 했고, 내구성이 약할 뿐만 아니라, 심지를 통해 기름이 새는 불편함이 있었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심지와 부싯돌의 불안정한 이격 거리였다. 너무 가까워도, 멀어도 불이 붙지 않았다. 조지는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여 직접 라이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 다른 젊은이들과 달랐다.


기본 원리는 임코와 비슷했다. 대신 철판으로 직사각형 케이스를 제작하고 위에 힌지를 덮었다. 심지와 부싯돌을 보호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렇게 해서 노출형인 임코와 달리 지포는 폐쇄형이 되었다. 이는 기름의 증발을 최소화하는 효과까지 있었다. 임코보다 빠르게 불을 붙일 수 있었고, 한 손으로 조작이 가능했다. 마땅한 이름을 찾을 수 없었던 초기에는 포켓 라이터라고 불리다가, 당시에 세계적으로 인기를 구가하던 지퍼에서 이름을 본 따 지포라고 명명했다. 이듬해 회사를 설립하고 ‘보다 빠르게’라는 스포츠 브랜드에나 어울릴 법한 슬로건을 내걸고 본격적인 판매에 돌입했다.


하지만 부푼 기대와 달리 지포는 임코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원통형인 임코에 길들여진 대중은 사각형인 지포의 모양을 이상한 시선으로 보았다. 어느 한 지역신문은 ‘인간의 손이 둥글게 말린다는 사실을 망각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창의력은 위기 속에서 나오는 법이다. 조지는 매우 영민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과감한 결단력의 소유자였다. 이때부터 지포의 그 유명한 마케팅 전략이 등장한다. 판촉용으로 제작해서 뿌리는가 하면, 세일의 시초인 재고떨이를 했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덤으로 주는 이벤트도 이때 나왔다. 가장 주목을 끈 것은 라이터를 개당 1달러 95센트(보라, 결코 2달러를 넘지 않았다)에 팔면서 무조건적인 평생 무료 보증을 약속했다. 애프터서비스의 개념이 없던 시절에 지포가 내건 평생 품질보증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 참고로 덧붙이자면, 지포의 마케팅 전략은 줄곧 모든 기업의 마케팅 교본이었다. 지포는 나이키 이전에 이미 하입(Hype)의 8부 능선을 넘어선 기업이었다. 애플을 비롯한 IT 선도 그룹과 스포츠 브랜드들은 지포가 흘린 마른 핏자국을 닦으며 손쉽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지포가 튼튼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판매량의 증가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기회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운 좋은 놈은 넘어져도 돈다발 위에 자빠진다더니,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1941년, 지포가 미국의 군수품으로 지정되었다. 습한 참호 안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지 못해 쩔쩔매던 연합군들은 척하면 착하고 담배를 피워 무는 미군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 적군 아군을 가리지 않고 지포는 최고의 히트상품이 되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리품 1순위는 무조건 지포였다. 누가 먼저 가로채기 전에 시체의 호주머니를 뒤져 지포부터 챙겼다. 독일군은 미군이 참전한다는 소식만 들어도 서로 먼저 가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장교들 사이에서 지포 라이터를 쓰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제2차 세계대전의 진정한 승자는 지포라는 말이 나왔다. 지포에 박힌 총알과 지포 덕에 살았다는 미담이 셀 수 없이 쏟아졌다. (이런 것까지 기획했다면 지포는 가히 혁명적인 전략가들이다.) 전쟁 뒤에도 지포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6~70년대 히피문화와 락 콘서트 문화가 미국을 강타하면서 대마초를 피우는 인구가 급증했다. 지포는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지포는 이런 오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광고에 활용했다. 이른바 ‘지포의 순간’이라고 불리는, 관객이 공연자에게 라이터를 켜면서 경의를 표하는 제스처의 유행도 지포의 흥행에 한몫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을 없다. 계속될 줄 알았던 지포 신화는 80년대에 들면서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최초의 위기는 값싼 일회용 라이터의 등장이었다.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던 찬사는 일회용 라이터에게 넘어갔다. 가격이 쌀뿐만 아니라, 주유를 할 필요가 없었고 심지어 잃어버려도 상관없었다. 게다가 재수 없는 놈은 넘어져도 똥밭에 자빠진다더니, 사람들이 건강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면서 금연 열풍이 불었다. 20세기 말부터 진행된 각종 소송에서 담배회사들이 줄줄이 패소하자, 더 이상 지포의 생명 연장은 불가능해 보였다.

지포는 자구책으로 디자인에 다변화를 시도했다. 소수 마니아를 위한 다양한 제품군이 쏟아졌다. 지포는 디자이너들과 아티스트들의 전초기지를 자처했다. 라이터 표면에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시각적으로 구현되었다. 재질은 구리에서부터 티타늄, 크롬을 거쳐 금, 은, 다이아몬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금속물이 소재로 쓰였고, 색상 또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똥오줌을 가리지 않았다. 이렇게 탄생한 지포는 하나의 제품으로써 만이 아니라, 예술품으로써 소장 가치가 충분했다. 그럼에도 일부 수집가들의 잔치라는 비난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지포가 무엇을 만드는지 알려면 다음 영상을 보시라.

세상은 더 이상 불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두어도 고사할 판에 쓰러져 가는 지포의 목을 딴 것은 전자담배였다. 이젠 흡연자조차 라이터가 필요 없게 되었다. 담배를 ‘피운다’, ‘태운다’는 말은 고리타분한 사장어가 되었고, ‘켜다’, ‘붙이다’는 말은 충전으로 대치되었다.     


▶지포는 평생 무료 보증이라는 기업 이념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망가진 라이터를 우편으로 보내면 수리를 해서 우편으로 돌려준다. 정 수리가 어려운 제품은 고객과 상의하여 소장자의 이름으로 박물관에 영구히 보관한다. 지난 한 세기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이고 아름다웠던 기업이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아버지가 쓰던 라이터까지 합해 10개 정도의 지포를 소유했었다. 모두 분실하고 지금은 한 개가 남아있다. 내 생애를 통틀어 단일 제품으로는 가장 긴 시간을 함께했다. 기름을 넣거나 청소하는 일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지포만의 감성 때문이었다. 인간이 마냥 편한 것만 찾지 않는다는 걸 지포가 보여줬다.     


▶▶아무리 지포가 예전만 못하기로서니 영화라는 매체에서마저 사라지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다. 다이하드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러닝셔츠 바람으로 뛰어다녔을 때, 비트에서 정우성이 손에 쥐고 주먹을 날렸을 때,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시린 눈을 깜빡였을 때, 콘스탄틴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골초로 나왔을 때, 그 모든 순간에서 지포를 빼놓고는 상상이 안 된다. 만약 고뇌에 찬 연기를 펼치는 주인공의 손에 전자담배가 들려있다면 나는 그의 진정성을 의심할 것이다. 험악한 악당이라 하더라도 지포 라이터를 들고 있다면 나는 그의 이면에 숨은 순수성을 끄집어내어 그를 다시 볼 것이다. 지포에겐 지포만의 소리와 냄새가 있다. 딸깍하는 소리, 기름 냄새, 부싯돌이 구르는 소리, 심지 타는 냄새, 그을음, 매캐한 연기, 손에 남은 쇠붙이의 시큰한 냄새, 겉으로 스며오는 은은한 잔열, 이 모든 것이 땀과 기름때로 얼룩진 지포의 또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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