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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Jun 01. 2019

길들여진다는 것

아기 띠

결혼하고 5년 만에 첫아이를 가졌다. 바쁘다, 준비가 덜 되었다는 말은 핑계였고, 아내와 노느라 정신 팔려서 겨를이 없었다. 4년이 넘어가자 주변의 시선이 바뀌었다. 무슨 수험생도 아닌데 6개월 바짝 노력해서 기어이 임신에 성공했다. 아기가 쉽게 생기지 않는다는 걸 코피 쏟으면서 알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2주의 예열 기간(산후조리원)을 거쳐 본격적인 육아에 돌입했다. 그때 알았다. 왜 어른들이 아이를 가지라고 했는지…. 군에 다녀온 남자들이 군대 가야 비로소 남자가 된다고 떠벌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본인만 당할 수 없다는 일종의 물귀신 심보였다. 모두가 불행해지는 것으로 사회의 동질감이 명맥을 유지하는 법이다.


아내는 아침부터 남편의 퇴근만을 기다렸다. 중간에 전화하면 소리 없이 훌쩍였다. 몸은 회사에 있어도 생각은 집에서 떠나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면 아이 보기 바빴다. 새벽에 잠들기 일쑤였다. 야근하고 밤늦게 들어간 날도 예외가 없었고, 회식은 차마 입에 올릴 수조차 없는 금기어였다. 출퇴근 버스에서 졸다가 종점까지 가는 날이 허다했다. 낮엔 아내가 울고 밤엔 내가 울었다. 


우리 부부가 초보여서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놈이 유난했다. 출산하는 날, 엄마 뱃속에서 빨리 나오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똥오줌을 잔뜩 삼켰다. 심장박동이 위험 치를 넘어가자, 의사는 수술을 권유했다.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말에 내 심장박동도 빨라졌다.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이는 당뇨에 합병증이 겹치면서 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혼자 3일간 병원에 입원했다. 신생아라 정해진 시간에만 면회가 가능했다. 인큐베이터 안에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거나 눈을 감고 있었는데, 유독 내 아이만 똑바로 눈을 뜨고 울어댔다. 어서 지옥에서 꺼내 달라는 호소 같았다. 갈 때마다 그랬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그렇게 많이 우는 아이가 있다고 했다. 정말 아프면 울지도 못한다는 말이 위안이 되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성질이 급한 놈이었다. 뒤집기, 기기, 말하기, 걷기 모두 빨랐다. 한시도 가만있지 못했다. 한창 기어 다닐 때는 뭐든지 잡고 기어올라, 1미터 높이 이상 되는 모든 가전 집기를 수건과 테이프로 감싸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크대 위에 있는 뜨거운 커피를 잡아당겨 응급실에 실려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10개월이 지났을 때, 자기보다 먼저 태어난 아이의 돌잔치에서 녀석은 박지성처럼 뛰어다녔다. 앉아있는 주인공에게 자기만의 언어로 훈계해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씹히니까 밥이고, 삼키지 못하니까 돌이었다. 잠을 자는 건지 기절한 건지 모를 때가 많았다. 언제 무슨 사고가 터질지 몰라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목줄이라도 채워야 하나 고민했다. 아내와 나는 바짝바짝 말라 갔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뜨고 옆을 보니, 아내가 잘 마른 명태처럼 누워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지금도 다이어트에 육아 이상이 없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게 참 묘해서 아무리 호되게 당해도 절대 망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과거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하는데, 틀린 말이다. 과거를 잊기 때문에 인류가 유지된다. 1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 즈음, 덜컥 둘째가 생겼다. 실수였다. 그렇게 쉽게 임신이 될 줄은 몰랐다. 2년 터울로 또 다른 찰거머리가 우리집에 나타났다. 다시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태어난 아이는 첫째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뒤집기, 기기, 말하기, 걷기 모두 느렸다. 가만히 누워서 잠만 잤다. 심지어 혼자 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놀다가 잠들었다. 하도 울지 않아서 잘 있는지 쳐다보면 천사처럼 웃었다. 가끔 기저귀나 갈아주면 손 쓸 일이 거의 없었다. 첫째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같은 배에서 태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런 육아면 열을 낳아도 괜찮겠다고 아내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 말이 씨가 됐다. 다시 2년이 흘러 잠깐 스쳤을 뿐인데, 셋째가 태어났다. 손만 잡아도 애가 생긴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나마 위안은 딸이라는 점이었다. 아들 둘에 딸 하나, 남들은 우리 부부의 금실이 좋은 줄 안다. 셋째는 영락없는 여자애였다. 울어도 첫째처럼 발버둥을 치면서 극렬하게 우는 법이 없었다. 눈물만 찔끔 흘리다가 달래면 금세 그쳤다. 


그렇게 아이 셋과 함께 울고 웃으면서, 한 해 두 해가 갔다. 지금도 끝난 건 아니지만, 10년가량 육아에 전념했다. 되도록 다른 일은 삼갔다. 해줄 수 있는 게 추억뿐이어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좋은 기억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 나는 인생이 짧고 괴로운 에피소드가 연결된 긴 코메디라고 믿는다. 나중에 부모를 떠올릴 때 재밌는 이야기가 아이들 입에 많이 담겼으면 좋겠다. 물어보면 벌써 잊은 게 많아 안타깝지만, -그래서 수시로 사진을 꺼내 지난 얘기를 들려준다. 약간 각색해서- 몸 어딘가에는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유난했던 첫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의젓해졌다. 또래에 비해 말씨가 곱고 애정표현도 잘한다. 요리사가 꿈이어서 엄마 아빠가 없을 때 동생들에게 각종 요리를 선사하는 멋진 청년으로 자란다. 오히려 순둥이였던 둘째가 사고뭉치다. 자기가 밤송인 줄 안다. 가시를 세우고 어디 덤벼보라고 도발해서 종종 쑥밭을 만들곤 한다. 등골정량의 법칙이라더니, 언제가 되었건 자식은 일정량 부모 애간장을 태울 수밖에 없는 존재다. 막내는 생존을 위해 영악해졌다. 텔레비전을 자주 보면 영악해진다고 하는데, 텔레비전 없이 책만으로도 인생을 다 산 애늙은이가 됐다. 가끔 철학적인 곤란한 질문을 던져 아빠를 당황하게 만든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 세상이 얼마나 큰 모순덩어리인지.


짧지 않은 육아 기간 동안, 아기 띠 덕을 톡톡히 봤다. 첫째를 낳고 신생아 용품을 꽤 많이 샀다. 다시 그때로 가면 사지 않을 게 대부분이지만, 아이 셋을 키웠으니, 결과적으로 ‘뽕’은 뽑은 셈이다. 그중에서 아기 띠가 단연 제값을 했다. 누런색이 원래는 맑은 청색이었다. 첫째에겐 안는다는 행위보다 족쇄의 기능이 더 강했다. 일정한 힘과 규칙적인 템포의 반동에 제압당한 첫째는 마지못해 자유 의지를 포기하고 잠들었다. 둘째는 계속 품에 있었다. 도통 걸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건 셋째가 태어나도 마찬가지였다. 좀 작았던 셋째는 아기 띠에 들어가면 겉돌아서 손으로 안는 날이 많았다. 대신 둘째 놈이 계속 뒤에 매달렸다. 그렇게 둘째를 업고 셋째를 안고 한라산 영실을 서너 번쯤 올랐다. 까마득한 일처럼 여겨지지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아기 띠는 포대기가 변화된 것이다. 허리에 가중되는 힘을 가방처럼 끈을 매달아, 어깨로 분산하도록 고안되었다. 여성들만의 전유물이던 포대기가 아기 띠로 바뀌면서 남성들도 ‘어부바’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앞에 안도록 설계된 건 남성의 입장에서 부담이었다. 무게 중심이 엉덩이에 있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아기를 안으면 균형을 잡기 어렵다. 남자의 신체구조를 고려하면 앞보다는 뒤로 매야 맞다. 종일 아기 띠를 매다 벗어던지면 중심이 흩트려져 달나라에 온 것처럼 발이 헛돌았다.


그러나 인간에겐 ‘적응(adaptation)’이라는 기막힌 생존 도구가 있다. 아기 띠를 매면서 나는 내 신체 변화를 직접 경험했다. 어깨가 좁아지고 복부가 옆으로 퍼졌다. 110에 육박하던 가슴둘레는 100 이하로 떨어졌다. 처음엔 인지할 수 없는 변화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러더니 급기야 엉덩이가 중심을 잡기 쉽도록 펑퍼짐하게 벌어졌다. 아이에게 맞게 변형되는 몸이라니, 특히 아랫배가 튀어나오는 건 아이에게 쿠션감을 주기 위한 중대한 변화였다. 아기 띠를 맨 엄마들이 놀이터에 있는 내 뒷모습을 보고 여자로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말을 붙이려고 다가왔다가 콧수염 난 험상궂은 얼굴을 보고 기겁을 해서 도망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내가 군에 갔을 때만 해도 병사의 사이즈에 맞춰서 군장구를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병사가 군 물품에 몸의 크기를 맞춰야 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실제 그랬다. 아무리 병사 간에 교환하고 조정을 해도 몇몇은 절대 사이즈를 맞출 수 없었다. 그러면 어쩌느냐? 몸이 사이즈에 맞게 변한다. 발이 작은 사람은 큰 군화에 맞게, 큰 사람은 작은 군복에 맞게, 처음엔 어색해 보여도 6개월만 지나면 모두 장비에 맞게 몸이 변한다. 겉돌던 군모도 전문 재단사가 만든 것처럼 안성맞춤이 된다. 길들여진 것이다. 


아이들이 내게 길들여진 것처럼 나도 아기 띠와 아이들에게 길들여졌다. 아기 띠를 벗어던진 현재, 원형으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 내 몸이 좋다. 여전히 아이들은 아빠 몸 위에 올라탄다. 올라타고 싶어도 올라탈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질식사할지도 모른다. 그날까지 말이 되고, 다리가 되고, 시소가 되고, 그네가 될 것이다. 백발성성한 아기 띠로 늙고 싶다. 



후기 


생일선물로 아내가 만들어 준 가방, 홍수에 떠내려간 슬리퍼, 찌그러진 양은 냄비, 전원이 꺼지지 않는 바이오 노트북, 벼룩시장에서 만난 영국식 찻잔 세트 …. 아직 하고 싶고, 해야 할 얘기는 많은데, 아쉽게도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 더 하면 잔소리가 될 것 같다. 연재하면서 내게 각별한 사물이 많아서 놀랍고 신기했다. 때론 사물이 주인공이 되어 스스로 스토리를 만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다 보니 나의 사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물에 의한 내 이야기였다. 사물이 내 역사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처음 기획하면서 ‘사물’이라는 말 대신 ‘용품’, ‘물건’, ‘제품’이란 말을 쓰려고 했다. 다 같은 의미인데, 내 의도와 다르게 전달될 위험이 있었다. 그냥 ‘물건’이라고만 하면 하대하는 것 같았고, ‘물품’이나 ‘용품’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실용주의 냄새가 났다. ‘상품’이나 ‘제품’이라는 말에선 자본의 냄새가 풍겼고, ‘물체’나 ‘물질’이란 말은 너무 학술적이고 딱딱했다. 온전하진 않아도 ‘사물’이 그나마 적당한 듯했다. 보통 사물이란 단어는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물질세계의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事物)로 쓰는가 하면, 사유물(私物)을 줄여서 말하기도 한다. 두 의미 사이 어딘가에 내가 원하는 지점이 보였다. 


지금, 문을 닫으며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사물은 쓰임새로 나뉘고 모양새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건 이음새다. 사물 자체의 이음새(내구성)만이 아니라, 사용자와의 이음새(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사물은 쓰는 사람의 손을 탄다. 같은 곳에서 만든 망치라 하더라도 내가 가끔 쓰는 망치와 목수가 매일 쓰는 망치가 다르고, 목수의 손때 묻은 망치라고 해도 내가 쓰면 며칠 만에 결이 달라진다. 물성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사물과의 인연은 어떻게 길들이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다행히 나는 사물 복을 타고났다. 지금껏 값나가고 귀한 것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가치 있는 것들과 제법 좋은 인연을 오래도록 이어왔다. 행복했다. 미래에 어떤 사물과의 인연이 기다릴지 궁금하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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