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우연 May 25. 2019

바람의 결

오토바이

돌이켜보면 나는 늘 일탈을 꿈꾸면서 살았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일탈한 적도 없다. 나는 이탈하지 않은 일탈을 했다. 중심에서 떨어진 아웃사이더였다. 살면서 가장 많이 벗어난 것은 오토바이를 샀을 때였다. 남들이 제정신을 차릴 무렵인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시기였으니, 사춘기가 늦게 찾아온 셈이었다. 몇 달 동안 돈을 모으고도 모자라 두어 달 치 월급을 몽땅 털어 넣었다. 주머니에 동전 한 닢 남지 않았다. 차비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니 상관없었지만, 점심은 굶을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당시 회사가 충무로에 있던 때라, 장충동을 출발해서 남산 꼭대기를 돌아 순환도로로 내려오는 코스가 내 점심이었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오면 몸에서 분비된 아드레날린으로 배고픔을 잊었다. 나는 점심도 먹을 수 없는 가난뱅이 직장인이었지만 누구보다 힘이 넘쳤다.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물뽕 맞는다’는 표현이 있다. 그만큼 중독성이 강하다는 말이다. 서퍼들 사이에선 ‘파도뽕’이라고 있다. 레포츠에 가산을 탕진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중독자들이다. 발은 땅에 서 있는데, 눈은 하늘 어딘가를 본다. 넋 나간 표정으로 혼잣말을 되뇌거나 이상한 자세를 취하면 영락없다. 라이더에게는 ‘바람뽕’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바람이라고 감히 말한다.


오토바이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공기의 마찰력은 세진다. 피부에 스치는 바람은 실상 공기의 저항이다. 라이더를 끌어안는 바람의 힘이 단단한 것은 그만큼 적정한 속도 이상을 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속도에 비례해서 공기의 입자가 조밀해진다. 라이더는 조여 오는 바람의 질감을 느끼게 되고, 나아가 바람이 자신을 포근하게 감싼다는 착각에 빠진다. 바로 거기에 오토바이의 매력이 숨어있다. 어느 여인의 품인들 그리 감미롭고 황홀할 수 있을까? 머리는 위험을 감지하고 끊임없이 경고 신호를 내보내지만 한 번 바람 맛을 본 몸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일요일마다 시외로 나갔다. 주로 춘천으로 갈 때가 많았다. 기껏 달려간 끝에 소양강댐 밑에서 막국수를 먹고 오는 게 전부였으나, 목요일쯤부터 키보드가 핸들로 보일 정도로 중증이었다. 한 번은 서해 낙조를 보겠다고 길도 험한 태안까지 가는 통에 간신히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즈음 나는 오토바이의 새로운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다. 어느 단계를 넘으면 핸들을 꺾지 않고도 코너링을 하게 된다. 스키에서 몸의 축(중심)을 이동해서 방향을 전환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처음엔 몸을 세우고 오토바이를 좌우로 눕혀 방향을 조절하다가, 익숙해지면 오토바이를 그대로 두고 몸으로 방향을 조절하는 경지에 이른다. 이쯤 되면 인생은 종착지를 향해 달린다.


처음 6개월은 집에서 아무도 몰랐다. 집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오토바이를 숨겨두고 다녔다. 그러다 사고가 났다. 택시 사이드미러가 내 왼쪽 팔꿈치를 치고 지나갔다.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나는 중심을 잃고 도로에 나뒹굴었다. 몸 오른쪽 어깨 위에서부터 다리 아래까지 아스팔트에 갈렸다. 몸이 반으로 나뉜 아수라 백작이 따로 없었다. 더운 여름이었는데 목까지 오는 긴 집업을 입고 식탁에 앉았다. 아버지가 밥 먹다 말고 덥지 않냐고 물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감기에 걸렸다고 했다. 오뉴월엔 개도 어쩌고 하면서 아버지는 혀를 찼다. 아버지 눈을 속이는 건 쉬웠으나, 어머니의 매서운 눈은 피할 수 없었다. 축구를 하다가 다쳤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두 번째 사고마저 축구 핑계를 대는 건 무리였다. 혼자 코너를 돌다가 미끄러져서 이번엔 왼쪽이 갈렸다. 상처가 전보다 더 심했다. 집업을 벗고 자는 아들의 몸을 몰래 훔쳐보고 깨워서 다그쳤다. 축구 얘기가 나오기도 전에 엄마는 어떤 확신이 있었다. 부츠를 신고 다니는 것부터 의심스러웠는데, 동네 분이 오토바이를 탄 나를 언뜻 본 모양이었다. 조심한다고 해도 뱀의 눈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그날부터 장장 1년 동안 시달림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엄마는 눈만 뜨면 나를 닦달했다. 나의 귀가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그럴수록 엄마의 집요한 잔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완전히 악순환의 고리였다. 엄마에겐 오토바이의 처치가 지상 최대의 과제였고, 나에겐 오토바이를 숨겨야 하는 것이 지상 최대의 숙제였다. 멀쩡한 오토바이를 회사에 떡하니 세워두고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엉뚱한 상황이 벌어졌다. 팔아버렸다는 거짓말을, 아들을 잘 아는 어머니는 믿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버티고 버티던 끝에, 내 손으로 직접 오토바이를 처분하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교차로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던 나를 뒤에서 어떤 차가 톡 하고 들이받았다. 고무줄처럼 그대로 튕겨 나간 나는 오토바이와 함께 차량이 맞물리는 교차로 한복판에 대자로 널브러졌다. 경적이 고막을 긁는 동안, 나는 아스팔트에 자빠진 채로 코앞에서 멈추는 덤프트럭의 무지막지한 바퀴를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당구 용어 중에 ‘나미 따다’는 말이 딱 그럴 때를 두고 쓰는 표현이었다.


그다음 날로 오토바이를 치워버렸다. 처음엔 홀가분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허전하고 쓸쓸했다. 생명을 부지하는 대신 나는 깊은 실의에 빠졌다. 입맛은 물론 살맛도 없었다. 주말엔 집에서 잠만 잤다. 아드레날린이 폭주하던 젊은이는 파김치처럼 폭 삭은 애늙은이가 되었다. 이쁘장하게 생긴 애들이 거리 샵에 나와, 출퇴근하는 내게 손짓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미어졌다. 튜닝한 머플러에서 부릉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나를 애타게 찾는 것만 같아, 주르륵 눈물이 났다.


회사를 옮겼다. 애초에 첫 직장이 충무로가 아니었더라면 오토바이를 사지도 않았을 터였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잊었다. 아니, 잊었다고 생각했다. 십여 년이 훌쩍 지나 차로 남산을 올랐다가 소월길로 내려오는 길이었다. 벚꽃이 만개한 길 양쪽에 꽃놀이 나온 인파가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훅 불어왔다. 꽤 센 바람이었다. 꽃잎이 바람에 날려 눈처럼 떨어졌다.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감촉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감정인지 망측하게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내가 볼까 봐, 하품하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더럽게 막히네.”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을 다룬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가슴이 끓었다. 돈키호테에게 로시난테가 있다면 자신에겐 ‘포데로사 poderosa’(영어로 powerful)가 있다고 큰소리친 게바라는 8개월 동안 남미대륙 8천 km를 달리는 대장정을 시작한다. 그의 운명을 바꾼 그 여행의 동반자는 영국제 노턴500 1939년식 단기통 오토바이였다.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게바라가 탔던 것 같다. 영화를 본 뒤로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하는 꿈을 종종 꾼다. 8천 km가 아니라 8백 km만이라도 달리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125cc 스쿠터여도 상관없다. 이름은 테라로사로 할까. 커피 향이 흠씬 나서 좋다. 그러나 과연 꿈을 실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머니 눈치에서는 해방되었지만, 여우 같은 아내와 하이에나 같은 아이 셋이 지금도 두 눈을 치켜뜨고 있다.


*타이틀 이미지 출처: www.gearpatrol.com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8대의 매끈한 오토바이가 있다.

이전 13화 영원히 피는 꽃은 없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