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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May 18. 2019

영원히 피는 꽃은 없다

하모니카

어릴 적에 막내 삼촌 닮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기분이 좋았다. 어린 눈에도 삼촌이 우리 집안에서 제일 훤한 인물이라는 걸 알았던 것 같다. 아버지와 나이 차가 많았던 삼촌은 못 하는 게 없는 재주꾼이었다. 공부 잘하고, 노래 잘 부르고, 동물도 잘 다루고, 운동도 잘해서 어디서건 대표를 도맡았다. 비록 작은 촌동네였지만 읍에 나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마을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서울대에 들어갈 수재로 점쳐지곤 했다.


삼촌이 한 쪽 다리를 잃은 것은 고등학생 때였다. 산에 올라갔다가 뱀에 물렸다. 깊은 산속에서 친구 네 명이 번갈아 가며 엎고 내려왔다. 이동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응급처치가 늦었다. 동네 병원에서 읍으로, 읍에서 다시 도시로, 도시에서도 상급 병원으로 옮겼지만 퍼지는 독을 막지 못했다. 할머니는 아들의 생명을 위해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다는 의사의 말에 눈을 감고 수술동의서를 작성했다. 1년이 넘는 치료와 재활을 거쳐 학교에 복학한 삼촌은 적응하지 못하고 자퇴서를 냈다. 워낙 주목을 받았던 사람이라, 낙차도 컸다. 따르던 여자와 친구들이 하나둘 떠났다. 삼촌은 방 안에 틀어박혔다. 


내가 삼촌을 처음 본 것은 삼촌이 서울로 이사와 산동네에 둥지를 튼 다음이었다. 옆에 아리따운 여자가 있었다. 병신이라도 인물이 반반하니 계집이 따르는 게지, 동네 어른들이 쉬쉬대며 하는 소리를 들었다. 삼촌의 신혼집엔 구멍가게가 딸려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그 집에 자주 놀러 갔다. 버스에서 내려 언덕을 한참 올라가는 힘든 길이었는데도 5살짜리는 투정 한 번 부리지 않았다. 


숙모라는 여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상냥하고 맵시가 좋았다. 옷, 말, 행동이 다 그랬다. 움직일 때마다 풋풋한 향기가 났다. 아버지와 삼촌이 장기나 바둑을 두면서 술을 마시는 동안 나와 놀아주었고, 번번이 가게에서 과자와 장난감을 안겨주었다. 


그런 숙모의 얼굴에서 갈수록 싱그러운 빛이 시들어갔다. 어린 내 눈에도 보일만큼 꺼지는 속도가 빨랐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숙모는 집을 나갔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예측하던 일이었다. 삼촌은 의족도 팽개치고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있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비쩍 곯은 얼굴로 인사불성이 되어 형을 잡고 엉엉 울었다. 어른이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보았다. 바람났다는 얘기가 나왔다. 얼굴값 한다는 말도 들렸다. 아무리 구멍가게라지만 여자 혼자 감당하기 버거웠을 것이라고 엄마가 말했다.


혼자가 된 삼촌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할머니와 살았다. 방학이 되면 나는 할머니 집에 갔다. 그때까지도 삼촌은 젊었다. 고향 떠난 친구들이 도시에서 오면 가끔 술을 마시러 나갔다. 그런 날은 언제나 술에 절어 돌아왔고 밤새 술주정을 했다. 삼촌은 점점 괴팍해졌다. 틈틈이 나에게 공부도 가르쳤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기타와 하모니카 부는 법을 알려주었다. 삼촌의 기타와 하모니카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기타는 몰라도 하모니카는 김광석보다 잘 불었다. 나한테 재능이 없는 걸 알고 삼촌은 몹시 화를 냈다. 나를 통해 꿈을 이루려고 했었던 건 아니었을 텐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시골에 갈 일이 점점 줄었다. 아버지에게 삼촌 소식을 간간이 들었다. 매일 술을 마신다고 했다. 어쩌다 삼촌을 만나면 무서웠다. 예전의 활기차고 유머러스한 청년은 사라지고,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중년이 되어있었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삼촌이 죽었다. 체했는데 약을 잘못 먹어서 그렇게 됐다는 말을 장례식에 다녀온 엄마가 전했다. 나중에 곱씹어 보니, 자살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사고라고 말했지만 어쩐지 믿기 힘들었다. 숙모 얘기도 들었다. 어디로 새 시집을 가서 애 낳고 잘 살더라는 좁은 고향에서 떠도는 소문이었다. 하늘거리는 월남치마에 백지장처럼 하얀 얼굴과 새초롬한 표정이 바람에 날아갔다.


장례식에서 할머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산 좋아하는 놈은 산에서 죽고, 물 좋아하는 놈은 물에서 죽는 법이니, 화장한 뼛가루나 좋아하는 산에 뿌려주라 이르곤 집에 일찌감치 돌아와 술에 취해 뻗었다고 한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먼지 쌓인 하모니카가 깊숙한 곳에서 나왔다. 삼촌에게 선물 받은 뒤로 한 번도 불어보지 않았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군대 갔을 때, 내무반에 기타와 하모니카가 있었는데, 제대하는 날까지 한 번 만지지 않았다. 여름밤, 술 한 잔 걸치고 평상에 걸터앉아 기타와 하모니카를 안주 삼아 노래 부르던 삼촌의 모습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한 폭의 그림으로 남았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불똥이 튀는 모깃불, 그리고 그 사이를 떠도는 반딧불이들. 숲에서 들리던 이름 모를 산 짐승의 희미한 울음소리에 가슴을 졸이면서도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삼촌의 노래를 끝까지 듣던 까까머리 중학생 내 모습이 어른거린다.


김정호의 노래 <하얀 나비>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님인데. 꽃잎은 시들어요.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원형은 수천 년 전 중국의 전통악기에서 기원하지만, 하모니카가 발명된 건 19세기 초반 독일이었다. 이후 미국에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대량 보급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러니 역사가 불과 100년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개의 작은 구멍을 통해 들숨과 날숨으로 울림판의 진동을 일으켜 소리를 낸다. 입술만 아니라, 혀의 역할이 중요하다. 삼촌은 하모니카를 잘 불어야 키스를 잘하게 된다는 농담을 자주 했다. 관악기 중에 가장 작고, 세상에서 제일 다루기 쉬운 악기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겐 아닌 것 같다. 불면 내 가슴에 숭숭 뚫린 구멍이 진동을 일으킨다.     


▶▶전축도 있었다. 삼촌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아마 가질 수 있었던 최고가였을 것이다. 턴테이블과 바늘을 제 몸처럼 애지중지했다. 아버지가 가져다준 많은 레코드판 중에서 비틀즈와 김정호의 노래만 들었다. 같은 노래만 들으면 지겹지 않냐 물었을 때, 지겹지 않으려고 듣는다는 이해하기 힘든 대답을 했다. 삼촌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물상이 와서 헐값에 가져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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