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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May 11. 2019

개에게 물어뜯긴 뒤에야

안경

어느 칙칙한 고깃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두 남자가 갑자기 두 손을 맞잡는다. 주변의 불편한 시선과 테이블 위에서 지글거리며 타는 고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남자는 건널 수 없는 국경 양쪽에 서 있는 연인처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다. 술에 취한 두 사람의 눈은 석쇠 속 고기보다 더 이글거린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다. 이들은 각자 가정이 있다. 게다가 그중에 한 명은 나다. 한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격하게 공감한 나머지, 그만 그런 추태를 부리고 말았다.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눈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흐릿한 말끝이었다. 두 사람은 안경을 착용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무 곳에서나 아무 때나 활자를 읽고 싶다는 욕망을, 안경을 쓰지 않는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대중목욕탕에서 전신 거울로 또렷하게 자신의 몸을 보지 못하는 자의 탄식을 들어본 적 있는가. -보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지만- 면도할 때마다 거뭇한 수염 몇 가닥을 남길 수밖에 없는 자의 비탄을 아시는지. 비 오는 날이나, 실내외의 온도 차가 많이 벌어진 날, 심지어 미세먼지로 고통스러운 날에도 마스크 위로 올라오는 습기를 보면서 인간이 항온 동물이라는 사실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슬픔을. 눈이 좋을 땐 모른다. 매일 먹는 음식도 안경을 쓰고 먹으면 더 맛있고, 안경을 쓰면 음악도 더 잘 들린다는 것을.


나는 서너 개의 안경을 돌려가며 쓴다. 용도가 다른데, 쓰다 보면 용도 구분 없이 사용하게 된다. 몇 해 전 벼룩시장에서 안경테 하나를 골랐다. 뿔테에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한 녀석이었다. 이천 원인가, 삼천 원인가 했던 것 같다. 전주인이 남긴 흔적이 곳곳에 있었지만, 오히려 그러한 점 때문에 빈티지한 느낌이 좋았다. 특별히 아낀 건 아니어도 다른 안경들보다 손이 자주 갔던 게 사실이다.


우리 가족 중에는 이빨이 튼튼한 개가 두 마리 있다. 아내가 금능해변에서 모셔온 상전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간직한 두 마리의 개는 유기된 과거의 앙갚음을 오롯이 나에게 퍼붓는 습성이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안경이 사라졌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안경이야 많으니 당장은 급하지 않아도 어디선가 나오겠지 하면서 기다렸다. 근 한 달이 지났을까. 녀석들이 쓰는 방석 밑에서 걸레가 된 안경이 발견되었다. 처음엔 안경인 줄도 몰랐다. 개껌을 잘근잘근 알차게 잘도 씹었구나, 칭찬까지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중간에 문드러진 구멍이 두 개 보이고, 다리가 떨어져 나간 곳에서 나사가 굴러 떨어졌다. 안경알이 구석에서 반짝반짝 약을 올리고 있었다. 분노 게이지가 목을 치고 올라가 눈에 다다랐다. 평소엔 죽도록 말귀를 못 알아듣는 놈(년?)들이 내가 화난 건 용케 알아채고 바람보다 빠르게 도망쳤다.(개들은 어떻게 주인이 화난 것을 알까? 내 눈에서 광선이라도 나오는 걸까?) 나는 마음을 추슬렀다. 어쩌겠는가. 3천 원짜리 개껌을 사줬다고 생각해야지.


그렇게 한 일 년가량 지났을 때였다. 어떤 잡지를 읽다가 그 안경테 광고를 보았다. 내가 썼던 그 안경은 아니었지만, 옆에 붙은 로고가 선명하게 기억났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아, 이런.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가격이 상상을 초월했다. 눈을 씻고 보아도 뒤에 붙은 ‘0’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하나가 더 많았다. 그 금액이면 내가 가진 안경테를 다 더해도 모자랐다. 인공장기에 들어가는 신소재로 만들었다는, 살아생전에 다시 써보기 힘든 안경이었다. 어쩐지 얼굴에 착 감기더라니. 다시 분노 게이지가 끓어올랐다. 씩씩대며 돌아보자, 사이좋게 다리 한 짝씩 나눠 씹던 놈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생각해보면 벼룩시장에 그 안경테가 나온 게 기적이었다. 3천 원 커피값에 한때의 호사를 누린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백지장처럼 알량한 사람이다. 세상에서 사라진 모든 것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개들이 물어뜯은 건 3천 원이 아니라, ‘0’을 세기도 벅찬 그 돈이었다. 개를 볼 때마다 안경이 어른거리고, 안경알을 굴리며 시시덕거렸을 놈들의 하얀 이빨이 떠올랐다. 어쩌면 뜯기 전에 번갈아 쓰고 개폼을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개에게 물어뜯긴 뒤에야 나는 나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눈은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시각정보는 뇌 구조 전반을 장악한다. 우리가 느끼는 감각의 대부분은 시각에서 온다. 좋은 눈이라고 해서 단순히 시력이 좋다는 말은 아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통찰력을 갖춘 눈이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어지간한 눈이어도 상관없다. 세상의 많은 천재는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하는데, 복잡한 것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화시키는 특출 난 능력이 있거나, 아니면 그런 천재를 알아보는 눈을 지닌 경우가 그렇다. 선천적 맑은 눈은 타고나지만, 후천적 밝은 눈은 만들어진다. 또한 눈은 삶의 지표와 균형을 위한 핵심 요소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철학적 해답은 눈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 물론 눈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고작 몇몇 선지자만이 봄으로써 시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런 것도 있다. ‘보는 것의 배후에 존재하는 보는 주체를 당신은 볼 수 없다. 듣는 것의 배후에 존재하는 듣는 주체를 당신은 들을 수 없다.’ 인도 경전 우파니샤드(Upanishad)에 나오는 경구다. 뭔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모순으로 가득 찬 이 말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는 인식론의 패러독스에 관한 설명이다. 내 눈 밖에 또 다른 매개인 안경을 통해 세상을 인식해야 하는 사람은 이러한 패러독스에 하나의 여과 장치를 덧씌운다. 따라서 보는 것이 눈이 아닌 안경을 지칭한다면 배후에 존재하는 주체가 객관화되어 볼 수도 있는 여지가 생긴다. 하여튼 눈이 나쁘면 이래저래 고생이라는 얘기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런가, 사는 게 늘 뿌연 안개 같아서 나는 그 말을 경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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