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우연 May 04. 2019

지독한 놈을 만나다

스카이 듀퐁폰

지난 연말, 스마트폰으로 갈아타기 전까지 나는 듀퐁폰을 썼다. 한 10년쯤 사용한 것 같다. 딱히 고집을 부리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쓰다 보니 그렇게 됐다. 사람들은 이 시대의 마지막 유물을 본 것 마냥 내 찌그러진 핸드폰에 경악했지만, 내 입장에선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이동전화는 말 그대로 이동할 때 통화만 잘 터지면 되었고, 나머지는 컴퓨터와 아이패드로 충분했다. 정 급하면 옆 사람의 폰을 빌리면 되었다. 대개의 경우 그렇듯이 불편은 당사자가 아닌 주변의 몫이었다. 


쥐꼬리만 한 혜택을 미끼로 각종 금융사와 온오프라인 마켓에서 어플 사용을 종용할 때, 그리고 머리가 큰 아이들이 왜 아빠만 그런 이상한 폰을 쓰느냐 물을 때를 빼고는 내가 2G 폰을 사용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들지 않았다. 아무 때나 잠깐의 발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동기부여의 조건이 되지 못했다. 망가지거나, 분실하거나, 통화 음질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바꿀 예정이었다. 


그러나 듀퐁폰은 너무도 건재했다.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앞으로 10년은 더 끄떡없을 게 분명했다. 부러는 아니지만 떨어뜨리고, 아무 곳에나 내동댕이쳤다. 심지어 지붕에서 추락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케이스가 떨어져 나가고 배터리가 분리될지언정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열 번 넘게 잃어버리기까지 했다. 택시에서, 음식점에서, 편의점에서, 혹은 인적 없는 산중에서. 전화를 걸면 누군가 받았고, 사례비 없이 잘 보관해주었으며, 찾으러 가면 골동품을 돌려주는 양 다소곳하게 내주었다. 한 번은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고 돌아와 보니,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신호가 잡혔다. 다음날, 모래 속에 묻힌 핸드폰을 꺼냈다. 운이 좋아서 밀물에 걸리지 않았고, 보고도 주워가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듀퐁폰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장점이 많다. 효율이 높은 놈이라, 충전 한 번으로 일주일 버티는 게 예사고, 멘탈이 좋아 웬만한 물과 흙은 툭툭 털면 그만이다.(최고의 방진은 먼지에 무뎌지는 것이다) 터치 기능이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스마트폰으로 착각한다. 단단하고 전도율이 낮아, 컵라면 위에 올려놓기 안성맞춤인 데다, 손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로 싸울 때 감싸 쥐면 무쇠 주먹이 된다. 시대의 흐름을 앞선 새끼손가락 크기의 펜을 탑재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게임과 통화가 가능한 멀티 기능이 있으며, 음악을 믹싱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다. 또 얇아서 응급 상황에서는 칼 대용으로 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DMB를 통해 공짜로 TV 시청이 가능하다.(전파가 잡힐 때까지 달려야 하지만) 시간 때우기 좋은 단순한 아케이드 게임이 깔려있다. 게임을 하면 동시에 발열이 되는 신소재로, 겨울엔 손난로가 필요 없다. 시도해 본 적은 없지만, 안테나를 빼면 전자담배로도 사용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듀퐁폰을 좋아하는 이유는 캡이라고 부르는 홀더를 열 때 나는 클링 사운드(Cling Sound) 때문이다. 듀퐁사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 ‘퐁’하고 경쾌하게 울리는 그 소리는 강력한 중독성이 있다. 나는 하루에도 수천 번씩 홀더를 열었다 닫았다. 할리데이비슨의 엔진 소리에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장담하건대 현재의 전기자동차에 할리의 전자 엔진 소리를 장착하면 판매량이 급증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거 모토로라 스타텍이 인기 많았던 이유도 열고 닫을 때 나는 소리와 회전축 기어의 거친 느낌 때문이었다. 모양, 디자인, 성능, 색깔, 촉감보다 우선하는 것이 소리다. 소리야말로 고단위 마케팅이다. 시각적인 요소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루해지지만 소리나 맛은 시간이 지날수록 중독성을 갖는다.


아이폰을 사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밋밋한 초기 화면에 슬슬 싫증이 난다. 왜 애플이 과거 컴퓨터에서와 같이 ‘땡’하는 부팅 소리를 삽입하지 않는지 의아하다. MGM 영화사의 로고 시그널에 사자 울음소리가 빠진 것과 같다. ‘땡’이 부담스럽다면 ‘아이’하는 소리라도 났으면 좋겠다. 설정 메뉴에서조차 없앤 건 애플의 명백한 기만이자, 방기다.     


▶정식 명칭은 ‘팬택 스카이 S.T. 듀퐁’이다. 프랑스의 듀퐁사와 제휴하여 클링 사운드를 장착했다. 제품 코드명은 IM-U510으로 다양한 색상이 출시됐다. 최고급 모델인 IM-U510SLE에는 ‘S.T. Dupont’ 로고가 새겨진 부분을 18K 금으로 씌우면서 제품 패키지에 18K Gold 보증서를 동봉하는 만용을 부리기도 했다. 그 위치에 개인 이니셜을 새겨주는 서비스까지 제공했던 걸 보면 팬택은 듀퐁폰을 명품으로 만들기 위해 사활을 걸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나치게 튼튼한 게 문제였다.     


▶▶아내는 내가 듀퐁폰을 오래 사용한 이유에 대해, 도태됨으로써 얻는 특별함을 즐기기 위한 행위라고 했다.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가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행렬에 반대하기 위해 하나의 운동으로써 ‘슬로우어답터’가 되었다기보다, 느린 게 부끄러워 차라리 멈춘 척했다는 요지의 일침이다. 나는 항변한다. 그러기엔 내가 너무 지독한 놈을 만났다.

이전 10화 침묵의 동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