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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우연 Nov 13. 2019

혀의 증명

에필로그

먹는 행위가 폭력인 시대다. 먹방 유튜브나 요리 관련 프로그램이 대중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난사하는 음식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음식 본래의 기능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호기심만을 자극해서 씹지 않고 맛을 느끼고, 입에 넣지 않고 섭취하도록 만든다. 개인의 취향과 자율적인 의지, 신체의 반응은 철저하게 묵살된다. 어느 때보다 음식이 풍요로운 시대지만, 반대로 음식으로부터 가장 멀어지고 있다.


한 문화 평론가는 이런 현상을 포르노에 비유하면서 성취할 수 없는 세대들의 은밀한 폭식 투쟁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직 성취 못 한 세대는 먼저 성취한 세대의 연애, 결혼, 육아를 보면서 대리 만족한다. 그것은 흡사 포르노와 같아서,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연애와 결혼, 육아를 한다고 착각한다. 이들은 모든 면에서 직면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직접 섹스하기보다 섹스 영상을 보고, 노래를 부르기보다 노래를 듣고, 게임하기보다 게임 영상을 즐긴다. 그들은 취업뿐 아니라, 생애주기에 따른 모든 이벤트를 대리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해소하는 데 익숙하다.


간접적인 경험에 의지할수록 자아는 점점 공허해진다. 욕구불만에 시달리는 대중이 할 수 있는 건 폭식에 기대는 것뿐이다. 방송에 나온 유명한 맛집을 찾아 미친 듯이 달려가고, 도저히 한 번에 먹을 수 없는 양을 쑤셔 넣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한다. 그렇다고 사회적 계급에 변화가 생긴다거나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먹는 순간만 즐겁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음식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목적은 우리를 영구히 대량 소비 체제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먹었으면 일어나야 한다. 누군가 입에 억지로 넣으면 뱉어내고, 소화불량에 걸린 몸을 돌봐야 한다. 더 이상 지구 상의 다른 종이 남획으로 사라지는 걸 방치할 수 없고, 내가 사는 곳이 쓰레기로 오염되는 걸 묵과할 수 없다.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다. 누가 지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음식마다 각자의 의미와 추억이 다르다. 지금부터 나는 혀로써 그걸 증명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끓는 라면에 수프를 넣으면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피자에 군침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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