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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필준 Oct 17. 2022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보다, 두렵다는 말로 바꿔보자

말좀 잘해보자.

다들 "스트레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아오! 스트레스, 아! 스트레스 받아, 스트레스 받아서 못살겠다!” 아주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 같이 있는 나도 스트레스를 같이 받는다. "스트레스" 이 단어만 들어도 스트레스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스트레스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과 오래 있고 싶지 않다. 말 그대로, 나도 스트레스 받으니까!


나는 궁금하다.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스트레스 받는다"고 말하는 걸까? 아니면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을 해서 스트레스를 받는걸까? 단어가 먼저일까? 스트레스가 먼저일까? 


그전에 생각해보자. 스트레스라는 말의 정의는 무엇일까? 스트레스는 원래 물리학 용어라고 한다. ‘외부로부터 물체에 가해지는 압력이나 압박’을 의미한다. 이 용어가 생물학을 넘어, 심리학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생물학에서는 생물체에게 가해지는 외부적 압력이나 압박이라는 의미가 되었다가, 심리학에서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외부적 압력이나 압박’ 이라는 의미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표현하나보다. "받는다"는 말은 피동형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스트레스를 받는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는 피해자가 된다.


외부에서 오는 어떤 압박에 의해 생긴다. 외부는 상황일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고, 자연적인 것일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어떤 이유든 스트레스를 받는다. 피해자인 우리는 무조건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는걸까? 그럴수도 있다. 천재지변급의 외부적 충격이라면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천재지변급 인간이 주는 압박이라면 우리는 스트레스 받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외부가 있다. 그것은 마음과 생각이다. 사람들은 마음과 생각을 내부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부가 맞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도 외부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내적 상태도 "환경"이기 때문이다. 환경이라는 말은 외부를 말한다. '내적 환경'이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내부이면서도 외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개선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나의 내면의 환경을 개선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는 이야기다. 내 마음의 상태와 생각을 바꾸면 우리는 스트레스를 덜 받을 수 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누군가는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패닉에 빠지기도 하고, 공황이 오기도 한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침착함을 유지한다. 더 강해지기도 한다. 웃는다. 같은 상황이라도 외부적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


우리의 내적 환경은 외부적 스트레스의 스피커라고 생각하면 된다.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의 데시벨이 15dB일지라도, 이 스피커를 지나면 150dB가 되기도 하고, 1.5dB가 되기도 한다. 내 마음가짐과 생각에 따라 스트레스의 볼륨은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던져졌고, 던져진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외부의 어떤 자극도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외부의 자극을 증폭시켜 죽을것 같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부적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어떻게 개선해야할까? 수많은 방법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나는 <두려움의 재발견>이라는 책에서 하나의 답을 찾았다. 답은 간단하다.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스트레스 받는다는 표현 대신에 “두렵다, 두려워요”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을 바꾸는 간단한 방법만으로도 많은 효과가 있다.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은 수동적인 표현이지만, "두렵다"는 말은 능동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는 큰 의미가 있다.


"스트레스 받는다"는 표현은 뭔가 무기력하다. 외부의 스트레스는 뭔가 거역할 수 없는 느낌이다.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이 강하다. 어쩔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불가항력이라 말한다. 불가항력에는 대항할 수 없다. 하지만 주체가 내가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두려움을 느끼는 주체는 내가 된다. 두려움을 주는 자극은 외부에 있을지언정, 두려움을 느끼는 감정의 주체는 바로 내가 된다.


이렇게 두려움을 느끼는 감정의 주체가 내가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두려움을 해소할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두려움을 주는 외부에 대항하거나, 상황을 개선하거나, 제거하거나, 피하거나, 내가 바뀌면 된다. 그러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끼면 사람들도 나를 도와준다.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는 귀엽기 때문이다. “니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스트레스 받아!”라고 표현하기보다는 “니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두려워..”라고 말하는게 귀엽다. 스트레스 받는다는 표현은 듣기만 해도 짜증이 나고, 두렵다는 말에는 동정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짜증은 그냥 짜증만 날 뿐이고, 두렵다는 말은 뭔가 해주고 싶어진다.


“스트레스 받는다”는 표현을 “두렵다”라고 바꾸는 것만으로도 나와 세상과 타인이 나를 돕는다. 그러니 말하는 습관을 바꾸자. 혼잣말과 나에게 하는 말과 타인에게 하는 말을 바꾸자.우리는 언어습관이라는 내부적 환경을 개선하여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쓸데 없이 소리만 큰 내부스피커의 볼륨을 줄여보기로 하자. 그 시작은 스트레스를 받지말고, 두려움을 느끼는데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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