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필준 Oct 24. 2022

신선

신선이란 무엇인가?

신선 [仙]

도를 닦아서 현실의 인간 세계를 떠나 자연과 벗하며 산다는 상상의 사람. 

세속적인 상식에 구애되지 않고, 고통이나 질병도 없으며 죽지 않는다고 한다.



신선이 되는게 가능할까? 일단 신선이 어떤 존재인지 분석해보자.

도를 닦는다.

사회가 필요하지 않다.

자연이 친구가 된다.

통념에 따르지 않는다.

심적으로 고통받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고통받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다.



분석한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


도를 닦는다. 도를 닦는다는게 무슨 말인가? 도를 닦지 않는 다는말은 무슨말인가? 도를 닦는 다는 말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다스린다는 의미로 받아드릴 수 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수많은 깨달음이 있지만, 신비주의적 깨달음이라는게 있다. 자신의 영혼을 인지하기, 세상 모든 것과 하나 되기, 우주적 체험 하기 등이 있다. 신선이 되려면 이정도 깨달음은 있어야 한다. 사람이 체험하기 가장 어려운 영역의 깨달음 정도는 있어야 신선이라 하지 않을까?


사회가 필요하지 않다. 사회가 필요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 신선도 신선이 되기까지는 사회에서 생활한다. 그러다 깨달음을 얻고 사회를 떠난다. 사회에서 생활을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것이다. <요가 난다 : 영혼의 자서전>에는 다양한 신선이 등장한다. 사람들을 교육하고, 치료하고, 치유하고,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신선도 있고,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나 외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며 살아가는 신선이 있다. 둘다 신선이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과 사회의 규칙와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우주와 자연의 규칙과 법칙에 동화되어 살아간다.


자연이 친구가 된다. 신선은 인간이기도 하면서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문명에 속해 살아가면서 인간이 된다. 문명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연의 일부를 배척한다. 특히 해충, 야생동물들을 배척한다. 하지만 신선들은 해충도 야생동물도 배척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술취한 코끼리를 한방에 제압한다. 인도의 성자 앞에서는 코브라도 춤을 춘다. 결코 공격하지 않는다. 호랑이와 사자들과 친구가 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신선은 자연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주와 하나이며, 자연과 하나이며, 해충과 야생동물과도 하나이다. 신선은 모두이면서, 모두의 친구다.


 통념에 따르지 않는다. 사회가 필요하지 않은 것과 일맥상통한다. 신선이 되는 길은 성인이 되는 길과 비슷하다. 일반적인 길이 아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늬들 중에 죄가 있는 놈들만 돌을 던져라, 오른뺨을 쳐맞으면 왼뺨도 들이대라” 2022년인 지금의 통념에도 맞지 않는 말이다. 우리는 돌맞을 놈이 있으면 있는 힘껏 모든 돌을 다던진다. 그리고 오른뺨을 맞기도 전에 라이트 훅을 날린다. 이게 통념이고, 상식이다. 하지만 이를 역행하는 삶이 바로 성인과 신선의 마인드 세팅이다.


심적으로 고통받지 않는다. 나는 신선은 아니다. 하지만 수 많은 신선급의 사람들을 분석해본 결과, 이들도 심적인 고통을 받는다. 하지만 고통이 덜한건 사실이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자신의 고통에 대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지 않는다. 둘째, 영혼과 마음을 분리한다. 설명을 하자면, 고통에 대한 가치 판단은 고통을 증폭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신선은 자신의 고통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두고볼 뿐이다. 그렇다. 두고 본다. 내것이 아닌듯 보고 있을 뿐이다. 마음조차 내것이 아니라면 고통받지 않는다. 영혼의 입장에서 마음을 보면, 마음도 내것이 아니다. 내것이 아닌 것에 고통받을 필요가 없고, 애초에 내가 없으면 고통받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고통받지 않는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죽기전 병을 얻는다. 상당한 크기의 종양이 팔이 생겼다. 그는 어떤 치료도 거부하고, 끝내 숨을 거두었다. 물론 신선은 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택했다. 앞서 신선은 영혼과 마음을 분리한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마음은 물론이고, 육체도 분리한다. 육체도 나의 것이 아니다. 마음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육체의 고통도 받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선택했다. 예수도 죽음을 선택했다. 부처도 죽음을 선택했다. 칸트도 죽음을 선택했다. 마하리쉬도 죽음을 선택했다. 이들은 죽음의 시간을 선택했다. 그들은 연명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삶도 죽음도 선택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필연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필멸한다. 반드시 죽거나 소멸한다. 하지만 신선과 성인에게는 죽음도 소멸도 선택의 문제다. 인간에게 부여된 숙명을 초월한다. 


최근에 대학교 후배에게 무슨 신선이 되실려고 그러냐는 말을 들었다. 그 친구는 신선이 뭔지 모르고 한 이야기 일것이다. 나는 아직 신선이 되기엔 멀었으며, 신선이 될 생각도 없다.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은 계속할 생각지만. 다다다다다닫닫닫닫다음 생에쯤엔 가능할까? 신선?


작가의 이전글 수면부족의 감사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