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계란을 먹고 있으면
토리는 늘 그때를 안다는 듯 달려온다.
꼬리를 흔들고
내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본다.
그 눈 앞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먹던 걸 계속 먹을 수가 없다.
입맛을 찹찹 다시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내가 뭔가를 잘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이 생긴다.
나는 토리를
가족처럼 생각한다.
어쩌면 가족보다도
조금 더 무장해제된 마음으로.
그래서 좋은 그릇에
밥을 담아주고 싶었다.
사람이 쓰는 그릇,
사람의 자리에서.
남편은 그걸 불편해했다.
사람 그릇에
강아지 밥을 담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토리의 그릇을 따로 정했다.
초코색의,
예쁜 그릇이었다.
그날 이후
그 그릇은 아무리 깨끗해도
우리의 식탁에 오르지 않았다.
그릇은 그대로인데
자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때 알았다.
그릇이 문제였던 게 아니라
의미가 문제였다는 걸.
어떤 자리에 놓이느냐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걸.
마음도 그렇다.
아무리 사랑에서 시작해도
한 번 낮아진 자리는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가끔
가깝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의 마음에
‘아무렇게나 써도 되는 자리’를 만든다.
그 자리가
개밥그릇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기억하려 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개밥그릇을 만들지 말 것.
사랑은
얼마나 주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