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일기
어제 목욕을 하다 문득 피부에 트러블이 올라온 것을 보고, 순간 불안이 스쳤다. 50대 초반, 무리한 삶 속에서 찾아왔던 자가면역질환이 다시 시작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다행히 하룻밤을 자고 나니 괜찮아졌다.
아픔은 언제나 겸손을 가르친다. 내 것이라 믿었던 몸, 내가 해낼 수 있다고 여겼던 많은 일들, 넉넉하다고 생각했던 시간조차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님을 알게 한다. 요즘은 몸의 소리에 더 귀 기울이며 일부러 여유를 부리기도 한다. 몸이 쉬면 마음도 쉰다는, 너무 단순해서 놓치고 살았던 진리를 이제야 배운다. 아픔은 내 삶을 관조하게 만드는 힘이고, 아무 일 없는 일상이 얼마나 큰 감사인지 깨닫게 해주는 귀한 기회다.
오늘은 우리 가족이 함께 큰집에 다녀왔다. 은성이가 태어난 뒤 처음으로 큰집에 인사를 드리는 날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형님은 이미 전어구이, 참게장, 홍어무침, 각종 김치와 김치찌개까지,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정성껏 준비해 두셨다.
식사 후에는 파김치를 담가 주겠다며 아주버님과 함께 밭으로 나가 파를 뽑았다. 농약을 치지 않고 길러서 더 건강한 재료라며 웃으시던 모습이 오래 남는다. 아주버님과 예서가 함께 파를 뽑고 다듬는 사이, 은성이네도 도착했다. 여덟 달 된 은성이가 혼자 서서 재롱을 부리자 온 가족이 한참을 웃었다. 힘드실 텐데도 정성껏 음식을 차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바리바리 반찬을 챙겨주시는 형님의 마음 앞에서 그저 감사할 뿐이다.
오늘 아침 본 프렌치 러버는 사랑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였다. 화려한 무대 위의 배우이지만 늘 불안하고 의존적인 아벨, 평범한 삶 속에서도 스스로 서는 법을 아는 독립적인 마리온.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성장하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
아벨은 마리온의 충고를 받아들이며 자립을 배워가고, 마리온은 아벨의 진심을 통해 ‘나도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사랑은 서로를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 주며 함께 성숙해지는 길임을 영화는 조용히 일깨운다.
특히 시상식 장면이 인상 깊었다. 조명 아래의 박수보다, 사랑하는 이 앞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순간이 더 큰 빛이었다. 사랑은 타협이 아니라 선택이며, 평범한 자리에서 더 단단히 자란다는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되어 감사했다.
어제 저녁에는 밤에 우리 영혼은을 보았다. 잔잔한 화면 속에서 이어지는 두 노인의 밤 대화가 마음을 깊이 울렸다. 사랑은 젊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 외로움을 고백하는 순간이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오래 남았다.
애디와 루이스가 서로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낼 때 오히려 치유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내 마음의 약한 부분을 인정하는 용기를 배운다. 그것이 곧 회복의 첫걸음임을 알게 되어 감사하다.
비록 끝내 한 집에서 함께 살지는 못했지만, 전화기를 통해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사랑이 꼭 같은 공간에서만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삶을 따뜻하게 비추는 것, 그것이 사랑의 또 다른 모습임을 느낀다.
큰집에서 돌아와 문을 여니, 하루 종일 기다렸다는 듯 토리가 튀어나와 나를 반긴다. 방방 뛰며 안기는 모습 앞에서는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자리에 앉을 새도 없이 토리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늦은 시간, 발길이 드문 때라 목줄을 풀어줄 수 있어 좋았다. 신기하게도 목줄을 채우면 고집을 부리던 토리는, 풀어주면 오히려 더 순해진다. 마음대로 갔다가도 내가 있는지 없는지 꼭 돌아보며 다시 다가온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한없이 흐뭇해진다. 아무 때나 목줄을 채우지 않아도 되는 산책이 가능해지기를, 문득 바라게 된다.
토리와 걷는 길 위에서 다시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도 이런 마음이 아닐까. 억지로 구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되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스스로 그 뜻을 따르길 바라시는 마음. 토리와의 산책은 내 삶의 자유 또한 사랑 안에 있을 때 가장 빛난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준다.
오늘 하루,
몸은 겸손을 가르쳐주었고
가족은 따뜻함을 나누어주었으며
영화는 사랑의 본질을 비춰주었고
토리는 자유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이 모든 순간을 하나의 감사로 연결해주는 감사일기를 쓸 수 있음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