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도 있었다.
바나나가 비싸고 흔치 않은 과일이었던 때가 있었다.
고귀하신 바나나님을 만나 뵈려면 동네 과일가게가 아니라 고급진 마트로 향해야 했던 그 때. 일년에 딱 한 번, 누추한 우리집에서 그 분을 만나뵙는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날이 있었으니 그 날은 바로 네 살 어렸던 내 동생의 탄신일.
동생의 생일엔 앉은뱅이 밥상 가득 맛있는 음식이 차려지곤 했다. 시장 빵집에서 진열되어 있는 모습으로만 접해봤던 생크림 케익에 바나나, 각종 과자는 물론이요 진귀한 열대과일이라는 파인애플이 통째 올라온 적도 있을 정도. 그 당시 파인애플을 생전 처음 접해 본 우리 가족은 도통 다듬는 방법을 몰라 아빠가 순전히 힘으로 울퉁불퉁 껍질 째 썰어낸 파인애플을 쪽쪽 빨아먹으며 입술이 퉁퉁 부르트기도 했었지.
아빠의 음력 생일과 동생의 양력 생일이 겹치는 달에는 둘의 생일을 합쳐서 치르기도 했다. 그럴 때의 상차림은 더 다양해져서 김이 모락모락나는 떡 반 말이 올라왔다 십시일반 이웃에 나눠지기도 하고 친척어른들과 아이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동생과 아빠의 생일을 축하하기도 했다.
반면, 내 생일상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매년 여상스럽게 챙겼기에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니라 도통 챙겨준 사람이 없어 기억나지 않는 것.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반 아이가 생일이라며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모아 성대한(?) 잔치를 벌인 적이 있었다. 그 덕에 전까지 딱히 생각없던 내 생일도 챙겨줬음 했던 마음이 들었을게다. 출근하는 엄마를 붙잡고 아침부터 떼를 부렸던 이유는. 한숨을 푹푹 내쉰 엄마는 예의 그 '네가 하고싶은 일을 다 하며 살 수는 없어' 라는 말을 내 뱉은 후 마지못해 내 손에 오천원이라는 거금을 건내었었다. 출근을 해야 하니 직접 생일상을 차려줄 순 없고 이 돈으로 네가 알아서 하라는 의미로 이해했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도 계획적(?)이었던 나는 생일상의 필수 구성요소를 추린 후 손수 장을 보러 다니며 내 생일상을 차려내었다. 엄마없이 처음 간 과일가게 앞에서 주인아저씨에게 말을 붙이질 못 해 몇 번을 망설였던 기억과 돈이 부족해 케익은 못 사고 초코파이 한 상자를 사서 동그랗게 쌓아올린 후 문구점에서 사 온 초를 꽂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동네 친구들 몇을 불러모았는데, 아뿔싸! 2교대로 회사 택시를 운전했던 아빠가 집에서 주무시고 계신 것이 아닌가. 그날이 딱 야간 근무조라 낮엔 주무시는 일정이었던 아빠는 내 생일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 없이 모여든 아이들을 쓱 한번 쳐다보곤 윽박지르듯 조용히 놀으란 말을 남기고 방문을 쾅 닫았다.
한번 손을 올리면 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때리곤 했던 사나운 성격의 아빠였다. 생일이고 뭐고 떠들다 두드려 맞을게 무서웠던 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조금만 높아져도 경기를 일으키며 입단속을 시키기 바빠했고 어린 내 친구들이 이런 내 마음은 아랑곳 않고 꺄르르 웃을 때 마다 점점 더 울고 싶어졌다.
결국 그 날의 생일은 집에 온 아이들을 쫓아내듯 내보낸 후, 상과 방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고 이불에 고개를 박고 좀 우는 것으로 끝. 그게 유년시절의 내가 집에서 생일을 치른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다.
그냥, 그런 날도 있었다.
남편 왈 : 장모님은 대체 왜 그러셨대?
나 : 글쎄, 엄마 아빠는 나보다 동생을 더 사랑했던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