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낯선 사람들과 한 장소에 모여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 불편할 때가 있다.
평범하디 평범한 내 인생엔 대화로 나눌 만한 에피소드가 별로 없는데 낯선 이들에게서 전해듣는 그들 인생의 장르는 언제나 흥미롭고 놀라워서 새삼 내 삶의 심심함을 깨닫게 하기 때문.
SNS 혹은 온라인 커뮤니티 눈팅에 빠져있을 때에도 불쑥 불쑥 부러워서 불편한 감정이 고개를 들어올린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이들의 로드무비, 학문을 연구하는 이들의 다큐멘터리, 사랑에 빠져있는 이들의 로맨틱 코미디, 프로불편러 분들의 르포 혹은 추리 장르까지...
타임라인을 채우는 여러가지 인생의 장르에 내 인생도 편입되었으면 하는 속물적인 바람.
#2
때때론 내 인생에 작가주의를 발휘해 장르를 스스로 부여하기도 한다.
평범한 에피소드에 가위질을 하고 살을 붙이는 인위적인 가공 끝에 탄생하는 장르는 대부분 기묘한 이야기 류의 자극적인 드라마.
주목받고자 하는 욕심에 만들어내는 장르이니 그럴 수 밖에. 그렇게 장르를 지어내어 에피소드를 툭툭 털어내면 흥행 여부와는 별개로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내 자아는 왜 이리 유치한지. 내 멘탈은 왜 이리 나약한지...
#3
아마도 기대감 때문인 것 같다.
앞으로 나에게 닥칠 인생의 작은 굽이굽이마다 '예상 가능한' 에피소드들이 있어서 그 상황에 처했을 때 이러이러하게 일이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기대감이 자꾸 장르를 부여하고자 하는 욕심을 만들어내는 것.
예를 들면 '출산 직후 아기를 맨 가슴에 안았을 때 남편과 함께 기쁨에 가득차 눈물을 흘리며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겠지'류의 휴먼드라마를 상상한다거나 하는 그런.
#4
기대가득한 상상이 맞아떨어지면 맞아떨어지는대로 어그러지면 어그러지는대로 내 인생의 심심함은 더해져간다.
맞아떨어졌을 땐 반전없이 흘러간 에피소드에 김이 빠지고 어그러지면 내 마음처럼 되지 않은 에피소드에 실망해서 대다수의 에피소드들은 폐기처분되어 버리기 때문. 폐기처분해버리니 장르도 붙일 수 없고 그래서 상영도 불가.
#5
그런데,
임신에서 출산까지. 별다른 장르가 없었던 내 인생 에피소드에 하나의 장르가 붙었다.
에피소드 이름은 분만, 주연은 나, 장르는 공포...
분만실의 축축한 기운. 차가운 분만의자에 혼자 남겨져 고통에 몸부림 치던 기억. 의료진들의 냉담 혹은 무심한 태도. 힘겹게 탄생한 아기의 서러운 울음과 그 모습을 들여다 볼 기운도 잃은 나.
아, 그렇구나.
장르가 부여될 수 있는 에피소드는 '기대 밖'에 있는 거였다.
맞아떨어지지도 어그러질 수도 없을 만큼 생소하고 갑작스러워서 자연스레 이야깃거리가 되거나 반대로 할 말을 잃게 만들 때. 그 때, 인생 에피소드에 비로소 장르가 달라붙는구나.
#6
모처럼 찾아온 인생의 장르는 (굳이 말해서 기분 좋을 일 없는)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류여서 여기저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대신 '죽을 뻔 했어ㅎㅎ..' 정도로 툭 치고 덮어놓게 되었다.
#7
그래, 여전히 나는 내 인생의 장르를 갈망하지만 공포는 원치 않아.
인생 굽이굽이에 대한 기대는 계속 되겠지만 기대 밖에서 닥쳐올 장르는 부디 happily ever after이길. 낯선 사람들과 모여 있는 곳에서 기분 좋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로 만들어지길. 내 인생의 심심함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덜 해지길.
공포에 휩싸였던 며칠을 간신히 뒤로 하고 오늘 그렇게 또 욕심을 부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