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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린저녁 Sep 20. 2017

사소한 문제들

#1

 식구가 늘어나는 것에 맞춰 인테리어를 바꿔야 한다며 몇 달을 북적거렸다. '문제는 수납이다'라는 주제를 세우고 매달려 눈에 띄는 공간마다 무언가를 우겨 넣으려 애쓰며 한 달, 우겨 넣고 남은 곳에 아기용품을 들인다며 하루 걸러 하루 꼴로 택배를 받고 풀고 정리하기를 또 한 달. 그 와중에 손으로 무언가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싱크대와 신발장을 시트지로 도배하고 부직포 블라인드를 이 창 저 창 도배하듯 붙이고 초음파 사진을 모아 놓은 앨범에 스티커를 덕지덕지 바르기도 했다.  


 언젠가 친한 지인이 나를 가리키며 '저 언니는 일을 만들어서 피곤하게 사는 성격이다'라 한 적이 있었다. 요 몇 달 인테리어를 명목으로 주말마다 나에게 시달린 남편은 '00이가 한 말이 딱 맞았어'를 매일 외워야 하는 주문인양 읊고 다니며 '그냥 살자, 지금도 괜찮다(사실은 귀찮다)'를 나에게 어필해댔지만 인테리어 이슈로 머릿속이 바글바글한 나를 말리진 못했다. 대신 '다음 주에 하면 안 돼?' '다음 주에 하자!' 등등의 발언으로 내 속을 긁어 일부는 포기하게 하고 일부는 혼자하게 하고 일부는 아직 못해 답답하게 했지만...




#2

 부직포 블라인드는 1+1에 6900원이란 기특한 가격구성이 1~2년 내 이사갈 집에 돈을 들일 순 없다란 내 신조에 맞아떨어지며 간택된 제품이었다. 입주한지 2년 남짓, 돈 아깝단 내 생각을 대표하듯 휑했던 우리집 창문에 드디어 가림막이 생긴 것이다. 저렴한 가격으로 고급스러움 혹은 세련됨 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없는 것보단 나은 모양새에 붙이고 하루 정도는 뿌듯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뿔싸, 이 녀석이 고정이 잘 안된다. 조잡한 플라스틱 핀을 접혀있는 모양대로 꼽으면 블라인드를 원하는 길이로 고정할 수 있다고 분명히! 설명서에! 쓰여있는데!! 


 가로로 차곡차곡 접어올린 블라인드의 양쪽 끝을 핀으로 고정시키면 어느새 한 쪽 끝만 펼쳐 내려와 기울어진 형태가 된다. 그 경사진 모양새가 내 안에 곱게 숨어있던 대칭강박을 깨워 밖으로 내 놓았다. 


드르륵 펼쳐지는 소리가 나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득달같이 달려들어 블라인드를 접어올린다. 일자로 접어올린 모양새가 고정이 된 듯 하면 됐겠지? 하며 돌아서지만 조만간 또 한 쪽이 풀어질 것을 알고 있기에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블라인드를 고정시키고 남은 창문에 비친 그녀의 눈빛이 광기로 번뜩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블라인드를 접고 고정시키며 싸이코 드라마 찍듯 지내다 보니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나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래 마음을 좀 내려놓자하고 삐뚤어진 안방 블라인드를 이틀째 묵묵히 지.켜.만 보고 있다. 




#3

 집 안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필연적으로 집 안 구석구석으로 시선이 가 닿는다. 밖에 있는 시간이 길었을 땐 몰랐거나 놓쳤던 부분들, 몰랐거나 놓쳤어도 사는데 크게 지장이 없던 부분들이 툭 하고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다. 오류를 짚어 고쳐내고 문제에 해결책을 찾아 실행하는 것이 직업인 나였다. 그 직업이 천직이다 싶을 정도로 성향에 잘 맞다 했던 사람이니 문제가 넘실대고 그만큼 해결책도 넘실대는 집안일에 무심할 수가.


 생산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도 한 몫 하고 있다. 돈을 받고 하던 노동에서 돈을 받지 않고 하는 노동으로의 변화는 적응기간이 짧지 않았음에도 변화의 강도가 컸던 탓인지 아직 채 적응하지 못해, 돈을 벌지 못하는 만큼 다른 부분으로 생산성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을 낳고 있다. 덕분에 셀프 인테리어, 요리, 돌봄 노동 등에 열성적인 주부 블로거 들의 게시글을 읽으며 대단하다는 감정보다 씁쓸함과 동질감을 먼저 느끼게 되었다. 




#4

 손을 끊임없이 놀려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우울감이 사라진다. 지금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만들어 낼 거리가 담긴 택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그 잉여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오만데다 손을 놀리는 행위 중에 하나이다. 택배가 한번에 도착해서 일거리가 쌓이면 기운이 북돋아진다. 이거 끝내면 저거, 저거 끝내면 요거. 끊임없이 일거리 즉 해결해야 할 목표가 생기는 것이 즐겁다. 노동과 정신병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되더라? 여유에서 오는 정신병도 있던가?




#5

 요근래 집안일 고민 중 하나는 빨래 보관함이다. 그간 수건과 일반 빨래만 구분하여 내놨던 시스템이었는데 아기용품이라는 분류가 하나 더 생기며 시스템에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원래 하던대로 다이소에서 손잡이가 달린 수납함을 데려와 세 개의 함을 나란히 늘어놓자니 좁은 집에 공간을 너무 차지한다는 단점이 생긴다. 차곡차곡 3단 구성으로 쌓아올리면 공간 차지를 줄일 수 있는데 그러려면 새 제품을 구매해야 하고 아직 멀쩡한 기존 제품의 새로운 쓰임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해야 한다. 기존 제품은 3단으로 쌓아올리는 것이 불가능한 형태이다. 


 아직 기존 제품의 새로운 쓰임새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고민만 거듭하고 있는 문제이다. 참 사소한 문제인데도 고민의 길이가 길다. 




#6

 사소한 문제라도 고민해서 해결하는 것은 즐겁다. '그냥 아무렇게나 해' 식의 사소하다는 취급만 받지 않는다면. 그래, 요 사이 내가 느끼는 정신적 강박의 원인이 이것인게다. 나에겐 중요하고도 신경을 건드리는 문제들이 누군가에겐 사소한 문제들이다. 집에 있어 내 눈엔 도드라지는 문제들이 집에 없는 사람에겐 스쳐지나도 모를 문제들이다. 내가 며칠을 두고 고민하고 있는 빨래 보관함에 대한 문제도 당신에겐 뭘 그런걸 고민해 그냥 사 정도의 문제인 것이 문제인거지. 너무 사소한 고민들인 걸 나도 아는데 그냥 살아도 된다는 것을 나도 아는데 집 외의 다른 바깥의 활동이 없어 집 안의 활동에 매몰되는 것이. 그것이 내 강박의 원인인 것이다. 



 해결되지 않는 아주 사소한 문제들.

 해결책이 안보이는 답답한 문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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