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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린저녁 Nov 18. 2017

젖젖젖

깝치지 말자


#1

살면서 딱히 모유수유에 대한 환상을 가져본 적이 없다.

예술작품 혹은 미디어에서 모성신화를 표현하는 대표 이미지가 '아기에게 수유하는 엄마'인데다 갓난쟁이를 '젖먹이'라 빗대 말하는 것이 알게 모르게 머리속에 박혀 있어 모유를 먹이는 것이 아기를 키우는 과정에 당연한 부분이라 여겼기 때문일게다.


그런데, 아기를 낳고 보니 가장 높고 가장 어려운 난관이 바로 모유수유였다.



#2

산후조리원 생활을 재미있게 표현하는 노래가 있다.

'밥 젖젖 간식 젖젖' 이라는 가사로 이루어진 이 노래는 조리원 생활을 경험해본 산모들 사이에서 큰 공감을 일으켜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것이 조리원에서 보내는 2주라는 시간은 '밥, 간식, 젖' 이 세 가지 일정이 24시간 쉼 없이 돌아가는 '수유 훈련소'에 입소한 것과 다름없으니까.



#3

산후조리원에서 산모들에게 제공하는 식사는 모유가 잘 나오도록 돕는다는 따뜻한 국물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1일 1식은 반드시 미역국이 나오는 식단. 마찬가지로 1일 세 번 제공되는 간식 역시 모유의 영양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고 알려진 견과류와 과채주스 위주.


조리원에서 서비스로 제공되는 마사지에는 모유가 잘 나오도록 돕는다는 가슴 마사지 1회가 포함되어 있고 매일 특정 시간대에 모유수유 전문가가 수유실을 방문에 수유와 관련된 질의를 받는다.


1인실로 이루어진 방마다 개인 유축기 구비는 필수이고 24시간 기준 3시간 간격으로 반드시 유축을 할 것을 권유하는 안내문을 입소 당시 배부해 준다.


아기가 배고파할 때마다 울리는 수유콜은 새벽이고 밤이고 1~3시간 간격으로 시도때도 없이 울리고 산모들이 유축한 모유를 보관하는 장소는 수유실 정면에 위치해 경쟁심리를 북돋는다.


그렇게, 모유수유에 큰 환상이 없던 나도 조리원에 입소하자 마자 시작되는 수유 스트레스에 압박감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모유의 양'과 '수유 횟수'에 집착하게 되었다.



#4

모유수유에 집착하며 보냈던 지난 한 달여간의 생활은 각설하고 결론으로 바로 넘어가자면 결국 나는 '완분(완전 분유수유)'하는 아기 엄마가 되었다.

쿨하게 나 개인의 건강과 미용을 위해 완분으로 갈아탔다던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 탓에 완분이 되었다던가 하는 이유가 있으면 좋으련만 집착은 했으나 제대로 된 정보나 계획이 없던 내가 여차저차 이러저러한 의견들에 휩쓸려 다니는 사이 아기에게 젖꼭지 거부가 와 자연단유하게 되었기 때문.



#5

아기를 붙잡고 며칠을 울었단 얘기도 각설.

초록 검색창에 모유, 단유, 분유 등의 단어를 도배하여 찾은 분유수유의 장점이나 영양학적으로 분유도 훌륭한 식사라거나 하는 글들은 감정을 추스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더라. 물론 이성적으로는 안다. 분유를 먹인다고 모성애가 덜하거나 책임감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유를 먹임으로써 얻는 장점이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도.


그런데, 본능적으로 내 가슴을 찾아 물던 아기의 얼굴과 쩝쩝거리며 젖꼭지를 빨던 입모양이 도저히 잊히지 않아 완분으로 갈아탄 지금에서야 뒤늦게 모유수유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6

아기를 낳기 전, 나는 쿨한 엄마가 될 줄 알았다.

아기를 키우는 과정에 집착하지 않고 남들이 다 한다고 무조건 따라하지 않고 등등 흔히 생각하는 쿨맘의 조건을 되내이며 쿨 해지는 것을 '쉽게' 생각했던거지.


모유수유에 집착하고, 실패하고, 아직 미련을 벗어던지지 못해 방울 방울 모유가 맺히는 젖꼭지를 짜내며 우는 동안 다시금 생각한다.


"앞으로는 깝치지 말아야지."



#7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경험들이 겪어보기 전에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육아'는 겪는 도중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여서 be cool을 다짐할 수 없는 분야이고 그 만큼 개개인의 사정이 다양하다는 것을 이번 기회로 알았다.


아기를 어떻게 먹이라느니 어떻게 입히라느니 어떻게 교육을 시키라느니.

아기를 왜 저렇게 먹이냐느니 왜 저렇게 입혔냐느니 왜 저렇게 교육을 시키냐느니.


남의 육아 방법에 가타부타 참견하지 말아야지.

내 육아 방식을 과신하거나 자신하지도 말아야지.

나에겐 나만의 사정이 있듯이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사정이 있을테니, 모유수유에 대해 내가 생각했던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그랬을 것일테니.


그러니 깝치지 말자. 육아에 '당연하다'라는 것이 없다는 걸 이번 일로 깨달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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