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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린저녁 Jul 03. 2019

쥐 가죽과 젊은새댁

청소년 필독도서였던가? 선생님의 소개로 학창시절 읽었던 근대소설 중에 유독 끔찍한 내용으로 기억에 남은 글이 있다. 

아이가 눈병이 나 아파 보채자 젊은 새댁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 죽은 쥐의 가죽을 벗겨 아이 눈에 씌워두면 낫는다는 주변의 말에 가죽을 구해 씌웠는데, 며칠이 지나도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의 울음이 멈추질 않아 가죽을 벗겨 보니 아이 눈구멍에 예쁜 눈 대신 구더기가 가득했다...라는 내용. 그 당시에도 참 끔찍하다 했는데 아이가 생긴 지금은 생각만해도 몸서리가 처질 정도의 이야기라 대체 그 시절 선생님은 무슨 억하심정으로 글을 소개해주었는지가 늘 궁금했다. 무지에 대한 경계심을 갖자? 혹은 무지할 수 밖에 없던 시대의 비극을 기억하자? 


서서히 잊혀지던 글의 내용이 다시 기억 난 건 몇 해 전 떠들썩했던 한의사에 대한 소식 덕분이었다. '안아키'라고 불리우던 카페를 운영했던 한의사가 징역형을 확정받았다는 소식. 


한의사의 징역형은 환영받을 소식인데 해당 카페를 드나들며 아이가 낫기를 소원했던 부모들은 지금 어떤 심경일지가 궁금하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지언정 일반 이상의 등급을 유지했던 부모라면 카페 내부에서 통용되는 방법론들에 어느 정도 신뢰가 있었을테다. 그리고 아마도 몇 가지 방법들을 실제로 아이에게 적용해보기도 했겠지. 숯가루를 먹인다던가 예방접종을 하지 않는다던가...


나 또한 아이가 나서부터 유독 병약했거나 하나의 질병이 잘 낫지 않고 길게 아프다면 절박함을 느꼈을 것 같다. 절박함이 느껴져도 할 수 있는 거라곤 아픈 아이들로 미어터지는 동네 소아과에서 딱 봐도 바빠 보이는 의사 선생님을 눈치없게 붙들고 우리아이 괜찮다는 답변을 듣기 위한 질문을 쏟아내거나 초록창에 이런 저런 검색어를 집어넣어 엇비슷해 보이는 다른 아이들의 증상을 찾아내어 우리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위로를 얻어내거나 밖에 할 수 없을테니.


그러고보면 절박함이란 감정은 매우 상대적인 것 같다. 나의 절박함은 매우 간절해도 상대의 절박함은 아이고 어쩌나 쯧쯧의 수준을 넘어서 와 닿질 않고, 비슷한 상황에 동시에 놓여있질 않는 이상 나의 절박함에 대한 상대방의 공감도 나에게 와 닿질 않는다. 그러다보니 같은 절박함을 공유하는 이들은 정보의 바다를 헤매고 헤매다 끼리끼리 모이게 되고 여기에 '자타칭 전문가'와 '성공사례' 한 두개만 들러붙으면 '안아키'가 되는겔게다. 

 

아이를 '잘' 돌 보는 것을 내외부적으로 강요받으며 육아가 지상 최고의 과제가 되어버린 엄마들은 더 할테지. 매몰된 만큼 시선은 좁아지고 아이의 일거수 일투족이 일상에 단단히 달라붙어 나라는 경계가 무너지면 밖에서 보기에 눈에 뵈는 것 없다 싶은 행동들도 스스럼없이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화상입은 아이에게 온수를 붓고 아이가 수두에 걸리도록 일부러 방치하고...


'자타칭 전문가'는 돈도 벌고 벌도 벌었다지만 잘못된 정보에 눈이 멀었던 부모들은 잃은 것만 가득할텐데 인터넷에선 자극적인 소재만 끌어와 너나없이 비난하기에만 열을 올리니 그들의 잘잘못을 떠나 문득 안쓰러운 마음이 들곤 한다. 쥐 가죽을 아이 눈에 씌운 젊은 새댁도 절박함이 눈에 씌여 이성을 잠시 잃었던 안아키 부모들도...




* 배경이미지 출처: http://how2drawanimal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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