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합리적으로' 무단횡단을 할 수 있게 된 언젠가의 우리들처럼….
하루에도 몇 건씩 쏟아지는 사건 사고들,
또 가십거리들.
누군가는 해고당하고,
또 누군가는 갑질 당하고,
누군가는 착취당하고,
동의 당하기도 한다.
‘당사자’나 ‘피해자’의 대척점에 선
‘피의자’, ‘가해자’, ‘악마’ 등의 이름이 붙은 그들.
그들은 항변하고,
또 억울해하고,
또 항변한다.
그런 그들에게
여간해서는 꼭 헌사되고는 하는
하나의 구절이자 시쳇말.
‘그도 사석에서는 호인이었다.’
‘그도 알고 보면 착한 사람이자
충실하고도 자애롭던 가장이었다.’
듣자마자 따분해서
하품이 뱉어져 나오는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사건사고나 가십거리들의 경중에 따라
몸서리가 쳐지기까지 하는 말….
우리가 그 말에
하품하거나
몸서리를 치기까지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그것은 비단
그 서사가 낡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더해 누군가가
그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고자
그런 말들을 뱉어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그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우리는 ‘그들’이 아니어서….
‘그들’이 될 리도,
될 일도 없다고 판단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그 근거는 당연히….
우리는 그 정도의 악행을
저지르지 않아 왔고,
않고 있고,
않을 것이니까.
혹은 그럴 것이라 믿으니까….
헌데… 과연 그럴까?
필자의 얄팍하고도 편협한 지식으로
미루어봤을 때,
세상 모든 행위들은
‘할 수 있는 일들’과 ‘할 수 없는 일들’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더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일들’에 묶인
여러 행위들 중 하나를
각자의 가치관에 의거해 간택해가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불필요하게
복잡한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리는
‘위법행위’, 또 ‘불법행위’들이
행위 그 자체로
‘할 수 없는 일’이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며….
우리는 우리가 품은 저마다의 가치관이
윤리, 또 도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전적으로 틀린 이야기도,
또 마냥 근거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는 선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악행만큼은 행하지 않는다고 믿으니까.
아니 그를 넘어
그럴 생각조차 품지 않은 채 살아왔고,
앞으로도 여간해서는
그렇게 사는 것이 맞기까지 할 테니까.
이것은 예단이나 짐작이 아닐 리 없겠지만,
그렇다고 영 근거 없는 것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각자가 선하게 살아왔던 그 세월들이
그를 근거하며,
전과 하나 들어서 있지 않은
우리의 깨끗한 신상명세서가
그를 무려 눈에 보이는 형태로까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이 저지른 지난 악행이 짚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짚이기까지 하니
자신은 더욱 그들과는
다른 사람일 것이라는 확신이
샘솟는 것만 같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정도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짐작이나 예단에서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라면….
당연히 이것이
언제까지 보장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놀랍게도 많은 것을 얻기까지 한다.
생애 곡선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겠고,
그만큼 다양하겠지만,
우리는 대체로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에서부터 시작해
학교라는 곳에 가서
이상적이지만 원론적인 이론과
책임없는 사회를 배우고…
어른이 되어서 사회라는 곳에 가서
명문화도, 규범화도 되어있지 않은
유수의 상규들과
책임 있는 사회를 배우며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이 뜯기거나
밟히기만 하는
말단에서부터 시작해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뜯고,
또 그를 밟을 수 있는
권력을 쥔 사람까지 되고야 만다.
‘인사권’이라는 문서 속의 권력이든….
또 ‘연차’라는 일상 속의 권력이든….
그렇게 먹게 된 나이,
또 차오른 연차와 높아진 직급.
또 잊혀가거나
이미 잊힐 대로 잊힌 말단 시절의 기억들.
그것은 그의 삶에서
그의 ‘무례’를 지적하는 사람을
사라지게 만들고,
그로써 그의 삶에서
‘무례’라는 단어 자체를 지우게 만든다.
또 그 직급과 연차가 요구하는 책임감과
그때까지 달리게 했던
노력이 낳은 보상 심리는
저성과자 말단 직원을
‘함께 달릴 수 있게끔
이끌어줘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 집단의 이익을 저해하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뿐만 아니라
말단 때에 들었다면
‘부당한 지시’로 해석했을
그 지시를
‘정당한 지시’로 이름 바꿔
하달하게까지 만든다.
그렇게 되면
그 ‘정당한 지시’에 이어 붙는 항변은
‘이기적인 저항’이자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읽히게 되고,
그를 행한 하급자는
‘명백히’ ‘단죄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
개기면 더 짓밟아주고,
버티면 말려 죽인다.
그렇게 우리는
그 옛날의 나를 너무도 손쉽게,
또 그러면서도 파괴적으로 퇴사시킬 수 있다.
이것은 비단
회사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는 많고 다양한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될 수 있다.
그 누구보다도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의 자아정체성을 찾기 위한 움직임을
한낱 세상 물정 모르고 벌이는 ‘일탈’로,
또 부모라는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읽게 되고,
외부 업체의 자구 행위와
조율 시도를 ‘월권’으로,
또 상대의 거절을
내 노력에 대한 ‘배신’으로 읽게 되며,
암묵적인 거절을 ‘거절이 아니게’
읽게 되기까지 할 수 있다.
초등학생 때
‘하면 안 되는 일’인 줄 알았던 무단횡단이
중학생 때,
‘효율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로
변화되던 것처럼
우리는 천천히,
또 정당하게 변해가고 스며든다.
물론 모든 일이 근거 있는 선택이었고,
정당했고,
옳은 선택이기까지 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를 택해왔거나
그를 그렇게 판단해왔던 근거가
나는 여태껏 나쁜 선택을 해오지 않았기 때문….
에서 그치고, 또 그것이 전부라면,
어쩌면
점검해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뉴스에 등장하는
극악무도한 범죄자…까지는
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하급자를 퇴사시키는 반장,
또 아이의 삶을 망가뜨리는 부모,
외부 업체를 향한 갑질을 행하는 업체,
또 연인에게 외압을 가하는 연인 정도는
충분히 될 수 있고,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의 애사심은 언제나 유구하며,
아이를 향한 사랑은 언제나 숭고하며,
연인을 향한 사랑은 언제나 찬란하겠지만….
사석에서는,
또 알고 보면,
또 정말로 실제로
호인이기‘는’ 했었던 그 사람들.
그들은 분명 그러했지만,
그 피해자들에게만큼은
그 어떤 악인보다도
더한 악인이 되어버리는 일이
그에 무감해지고도 남을 만큼
자주 발생하는 이 시대.
누군가가 나를 위해,
또 내가 나를 위해
“나도 알고 보면 호인입니다.”
같은 공염불을 외는 날이
오지 않을 수 있게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