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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케빈 Jun 09. 2022

드디어 얼굴 제모를 했습니다

아빠의 육아 휴직 이야기 #10

 육아 휴직 버킷 리스트에 넣어놨던 것을 또 하나 시작했다. 이건 꽤 오랫동안, 아마 20년 정도는 하고 싶었고, 매번 할까 말까 고민하다 접었던 일인데 바로 얼굴 제모다. 난 얼굴에 수염이 많이 나 어릴 때부터 콤플렉스였다. 매일 면도해야 되고, 면도를 해도 금방 거뭇해지고, 면도를 자주 하니 피부 트러블도 자주 생기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았다. 턱수염이나 구레나룻 정도는 그래도 괜찮은데, 볼에도 수염이 많이 나 누가 얼굴을 만지기라도 하면 질색을 했다. 다행히 와이프를 만나며 (자기에겐 없다며) 까끌한 얼굴을 좋아해 줘 콤플렉스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불편한 건 여전했다.


 마음 같아서는 수염을 멋스럽게 기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회는 유독 수염을 더럽다 생각하기 때문에 회사에 출근할 때는 항상 깔끔히 면도를 하고 다녔었다. 그래도 와이프 덕분에 휴가 기간,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면 항상 면도를 하지 않고 지냈다. 이게 묘한 해방감을 줬고, 정말 자유가 됐다는 느낌을 줬었다. 작년에는 중국 출장을 나가며, 중국 입국 후 4주 격리를 하며 한 달이나 수염을 기른 적이 있었다. 자라나는 수염을 관찰하고, 3주 차 정도에는 유튜브를 보며 나름대로 관리를 해 카페 사장님 같은 느낌으로 수염을 기르기도 했었다. 물론 격리 끝남과 동시 면도를 했지만.


 수염을 계속 기를 수 있었으면 제모에 대한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서양권과 동양권의 수염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왜 생기는지 궁금해졌다. 실제로 서양권에서는 수염이 없는 남성을 매력이 없는 어린아이처럼 생각하기도 하고, 섹스어필이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동양권은 수염이 없는 얼굴을 더 선호한다. 그 차이는 인종에 따른 수염의 양에 있었다. 한국과 동아시아인의 수염의 양은 1cm2당 120개, 서 아시아인은 160개, 서양인은 190~200개 정도로 차이가 난다. 서양인은 타고나기를 수염이 보기 좋게 나고,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면도하기도 어렵다는 소리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면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보편화된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일반적인 동아시아인 정도의 수염의 양이면 나도 제모를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난 서 아시아인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면도하기 힘들단 생각을 15년 정도 하다 결국 병원을 찾았다. 마침 집 바로 앞에 피부과 전문의 선생님이 병원을 차려주셨고, 장비도 ‘젠틀맥스 프로’라는 평이 가장 좋은 장비로 제모를 한다고 한다. 의사 선생님도 제모를 하셨다며, 적극 권장하셨고, 내가 가진 수염의 양을 봐서 5회 정도 (한 달에 한 번) 하면 효과를 확실히 볼 거라고 얘기를 해 주셔서 결제를 하고 다음 날 병원을 찾았다.


 로션 비슷한 게 생긴 마취 크림을 목, 얼굴 구석구석 바르고 침대에 누우니 곧 선생님이 오셨다. 뜬금없이 곰돌인지, 펭귄인지 인형을 하나 주시며 잡고 있으라고 하셨다. ‘유치하게 뭔 인형을 주시지?’라고 생각한 예전의 날 그대로 일으켜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다. 선생님의 한 마디와 함께 제모가 시작됐다.


 “이제 시작할 건데, 이렇게 아픈  맞나란 생각이 들건데, 그게 맞아요. 최대한  아프게  드릴 테니 조금만 참으세요.”


 처음 한 방을 지지자마자 배 위에 있던 곰돌인지, 펭귄인지 모르겠는 그 인형을 뜯어질 만큼 꽉 쥐며 “억!!!!!” 소리를 냈다.


 “많이 아프시죠? 어떡해요.. 저도 해봐서 아는데 정말 아파요. OO님은 다른  보다 수염이 많아  아프실 거예요.”


 분명 상담할 때 아프단 얘기는 없었는데, 정말 아팠다. 침대에 누워, 다 큰 남자 어른이 인형에 의지한 채, 두 다리를 비비 꼬아가며 그 시간을 버텨냈다. 눈물도 조금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혼이 다 나갈 정도로 아팠다. 끝나고 한 달 뒤 다음 예약을 잡는데, 5회권 끊어도 다 안 오는 분들도 있다고 얘길 하신다. 그런 얘긴 미리 해주시지.. 한 달 뒤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확실히 한 번 치료를 받았을 뿐인데 수염의 양이 눈에 띄게 확 줄었고, 자라나는 속도도 느려졌고, 정말 얼굴이 깔끔해졌다. 수염 자국도 없어지니 어려 보인단 얘기까지 듣는다. 5회를 다 받으면 더 좋을 건 당연히 알겠는데, 진짜 당연히 아는데 용기 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오랜 기간 고민한 수염이 사라지고 있으니 좋긴 하다.


 + 아, 그때 가장 의지했던 그 인형이 곰돌인지, 펭귄인지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음에 가면 이것부터 확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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