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난 축제, 주현절 퍼레이드 in 세비야
여행 다니면서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만큼 곤혹스러운 일이 없다. 전형적인 서구형 입맛이긴 해도 빵과 고기가 한국에서 먹던 것과는 모든 면에서 달랐기 때문에 좀처럼 적응을 할 수 없었다. 기내에서 받은 고추장도, 가지고 간 라면도 다 떨어질 즈음 나와 친구는 매일 한 끼 정도만 겨우 챙겨 먹게 되었다.
세비야는 코르도바에서 멀지 않다. 여행 당시에만 해도 이 두 도시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 낯선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음식 이야기를 서두로 한 것은, 숙소 앞에서 먹은 케밥이 여행을 통틀어 가장 맛있었기 때문.
허름한 가게라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두껍고 바삭한 빵과 푸짐한 고기, 입맛에 꼭 맞는 소스와 느끼하지 않은 감자튀김까지 모두 완벽했다. 가게를 찍어 놓지 않아서 다시 찾아갈 수 없다는 아쉬움이 아직까지도 여전하다. (감자튀김 위에 뿌려주는 사워 소스 느낌의 소스는 진짜 고소했음.)
호텔에서 자전거 투어를 추천해서 여기저기 알아봤는데 이날은 주현절이라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발길을 재촉해서 도착한 곳은 스페인 광장.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하늘에 새빨간 애드벌룬. 코카콜라였구나. 절묘한 배색 조합으로 눈길을 끌었다.
같은 배경을 필름 카메라로 찍은 것. 세비야에서 가장 유명한 곳일 텐데 사람이 너무 없어서 어리둥절했다.
광장의 중심에 있는 분수대. 여행 내내 고풍스러운 건물과 자연 배경의 절묘한 조화로 줄곧 감탄을 자아냈는데 역시 이날도 날씨가 맑아서 찍는 사진마다 감탄사가 새어나왔다.
광장을 짧게 둘러본 후 시장을 보고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엄청난 인파가 눈앞에 나타났다. 사실 주현절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었기에 당황스러운 풍경이었다. 호텔에서 추천해준 자전거 대여소가 모두 전화를 받지 않고, 광장에 사람이 없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구나, 하고 그제야 느꼈다.
주현절 퍼레이드는 한국에 돌아와서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예수의 출현을 축하하는 기독교의 교회력 절기로, 날짜는 1월 2일부터 8일 사이의 주일 (2015년의 경우 1월 4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주님 공현 대축일'이라 일컫는다. 퍼레이드를 진행하며 사탕을 던져주는데 이 아이에게 거의 헌납했다.
퍼레이드를 진행하는 사람들은 각각의 테마에 맞게 분장을 하고 행진하고, 말을 탄 로마 무사(?)들이 그들을 호위했다. 말이 지나가면서 자연스레 배설물을 투척했기 때문에 적정거리를 유지하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나 영화 속 주인공을 묘사한 모습은 왠지 모르게 친근함을 주었다.
더 이상 사탕을 넣을 곳이 없어 버려진 비닐봉지를 주워 그 안에 담아 싹쓸이했는데 결국 귀여운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말았다. 갑작스레 만난 축제라 사람들을 따라 움직였고 그래서 좀 더 여유롭게 즐길 수 있었다.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따라 즐거워하는 어린아이들의 마음이었달까.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퍼레이드가 시작되면서 모든 가게가 일제히 문을 닫기 시작한 것. 퍼레이드가 끝나고 나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열었지만 그 순간은 모두가 "즐기고" 있었다. 거리에 나와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건물 발코니에 나와 손을 흔드는 사람들, 갓난아기까지 데리고 나와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몰라도 순간을 함께 공유하는 친구가 되어 있었다. 눈을 마주치면 함께 웃고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정말 "쿨" 했다.
축제를 사전에 알아보고 참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이렇게 불현듯 다가온 축제를 맨몸으로 느껴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라 생각한다. 여행 막바지에 다시 한 번 생기를 얻을 수 있었던 곳. 소박한 사람들을 만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곳. 세비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