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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로이 Sep 12. 2016

#1. Milano, Italy

스쳐가는, 밀라노.


Prologue

 나는 훌륭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 윤리적인 가치관이나 성향이 보수적이었던 이유도 그런 믿음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때로는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 삐져나왔고 그럴 때마다 누군가를 잃거나 크고 작은 사건들이 생겼다. 타인이 기대하는 나의 모습은 이미 고착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을 수 있다. 자연히 자신감은 떨어졌고 나의 판단이 남들과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일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결과적으로 내 삶의 패턴이 소극적으로 변했고 기준 역시 내가 아닌 타인에게 맞춰지고 말았다.

 서른이 넘은 나이 역시 그런 변화에 크게 일조했다. 끊임없이 실패하고 상처를 받아도 괜찮을 수 있던 스물의 패기들이 소멸하고 점차 포기와 타협으로 나를 다독였다. 결국 무기력하고 소심한 삼십 대 여성만이 남아, 자꾸만 나약해질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삶의 방향성이 변화하려면 강력한 계기가 작용해야 한다. 나는 여행이 그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녀오면 분명 달라질 것이야.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는 달라질 거라 믿었다.

 

 첫날은 비행만 했다. 부산-도쿄-파리-밀라노 여정. 45일간의 여행에 기내 반입용 캐리어 하나와 에코백 하나가 전부인 미니멀리즘 여행이 시작되었다. 비행시간이 가장 긴 도쿄-파리 구간은 다행히 비상구 자리에 앉게 되어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이코노미석 같지 않은 넓은 자리. 시작이 좋구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장기여행. 그가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꿨을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내게 건넨 선물은 영국에서 샀다는 바버 재킷. 나보다 45일 먼저 날아가서 유럽을 돌고 있던 그가 내내 품고 있던 것이라고.


 스무 시간 남짓하는 비행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테러 의심 인물이 밀라노로 왔다는 이유로 공항은 폐쇄가 되었고 버스와 지하철은 모두 끊긴 상황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긴장감이 밀려왔는데 그가 있었기에 무사히 숙소로 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던 첫날.

 

 숙소에서 바로 잠을 청하고 둘째 날이 밝았다. 베니스로 가기 위해 짐을 꾸리고 잠시 밀라노를 둘러보았다. 전날의 긴장감 도는 밤 풍경과 달리 매우 화창하고 붐비는 두오모 앞은 비둘기 반 사람 반.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흑형이 다가와 비둘기 모이를 건넨다. 조심해야 한다.


 구도가 삐뚤 해서 피사의 사탑 느낌이 난다. 밀라노를 찍은 사진이 이것밖에 없다는 점이 이제와서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제의 걱정은 모두 잊은 듯 참으로 신났다. 여행 첫날의 설렘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처음 느꼈을 때와 같은 것. 뭉클하고 벅찬 마음으로 베니스로 향했다.


  Luini, Panzerotti 기차에서 먹으려고 샀는데 피자만두빵(?) 같은 것인데 구운 것보다 튀긴 것이 더 맛있었다. 식은 후에 먹은 탓에 소름 끼치게 맛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16.07.19 ①

 스쳐가는 밀라노는 정말 두오모 정도만 봤기 때문에 프롤로그 같은 장소로 느껴졌다. 귀국한 지 열흘이 지나고서야 정리를 끝낸 사진이 1,800여 장이니 밀라노는 정말 스쳤구나. 살벌한 분위기의 밤과 활기찬 분위기의 낮이 너무 대조적이라 강렬하게 기억에 남은 곳. 실제로 머문 시간이 별로 길지 않아 '최후의 만찬'도 보지 못하고 여러 맛집도 풍문으로만 남기고 돌아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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