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터뷸런스 Jun 05. 2018

이해가 되는 게 비정상이고, 안 되는 게 정상.

당신을 완벽히 이해한다는 말을 쉽게 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

나는 나 자신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데 타인을 완벽히 이해한다는 건 너무나 오만한 말이다.

대신 타인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된다. 

나도 경험이 많다고 자부하지만, 타인의 방식이 이해 안 될 때가 너무 많아서다.


그래서 최근에 과감히 선택한 것 중 하나는 타인에게 이해를 강요하지도, 구걸하지도 않는 것이다.

누군가 날 완벽히 이해하려면 나의 모든 상황과 배경을 알아야 하며, 그 상황 속에서 내가 갖는 마음의 모양과 온도까지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다만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것을 일일이 설명할 것이며 납득시킬 것인가. 불가능에 가깝다.

마치 무조건 최고가 되라는 말만큼 별로다. 최선을 다하라 가 차라리 더 와 닿는다.


이 태도는 관계에서도 적용 가능하다. 나는 당신을 최고로 잘 이해하지는 못한다. 다만 최선을 다해 이해하려 노력할 뿐이다.

10중 5가 이해되면 남은 5는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모두가 피곤해지는 이유는 여기서 비롯된다. 이해하고 남은 5 마저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발버둥 치는 나"와 "이해하기 싫은 나"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이다.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지 마라. 이해가 안 되면 그건 그냥 둬야 한다. 

선함과 악함, 보편성, 스탠더드라는 이름하에 자꾸 개인의 특성을 제한하려들면 당신만 혼란스러워진다.

개인의 다양성은 당신이 알고 있는 평범함의 영역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실제로 다들 각자의 캐릭터를 상당 부분 숨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만 한국사회 특성상 어느 조직이나 모임에서도 지나치게 튀는 것은 용납되지 않기에, 누르고 살거나 티 내지 않는 것뿐이다.

지금 당신 눈앞에 보이는 그 사람의 모습은 그마저도 많이 숨긴 거라는 뜻이다. 와우!


그런데 이면에 숨겨놓은 더 수많은 것들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나는 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그런 태도가 당신을 생각의 틀 안에 옥죄여 놓았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가진 이해의 크기가 조그마한 종이 상자라고 생각하자.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의 다양성은 당신이 가진 이해의 크기보다 훨씬 큰 거대한 체육관 정도 된다.

애초에 다 담을 수 없다는 게 인정이 되면, 이해가 안 되는데서 오는 억울함이나 곤란함이 덜해진다.

-

무조건 이해만 하려 하다 보면 쌓여서 오해가 된다. 

해변가에는 무수히 많은 자갈들이 있지만, 각자 크기와 색이 조금씩 다르며 같은 것은 단하나도 없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모든 면을 다 담거나 품지 못해도 괜찮다. 

당신이 이해하기엔 너무나 많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이 늘 안 하던 짓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