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남 탓하는 사람과 내 탓하는 사람 딱 두 가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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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나라에 큰일이 터지면 대통령은 스스로 내 탓이오- 해야 하는 위치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스스로 유체이탈 화법을 쓴다고 말한다.
사회는 촘촘하게 얽힌 시스템의 망이다. 그 시스템의 망을 구성하는 게 정부에서 주도하는 일이기에, 그 시스템 안에서 치명적 오류로 큰 사고가 생겼다면 대통령이 잘못을 했든 안 했든 사과를 해야 하는 위치인 셈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게 생기는 일은 대부분 내 탓이라고 보는 게 좋다.
설령 나의 과실이 거의 없다 해도 나와 타인의 접점에서 생기는 일은 단 1프로라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사고 관념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주어진 모든 관계에서 겸손함을 챙길 수 없다. 내가 완벽하고 니들은 잘못했다는 식의 논리는 게임 안에서 초등학생들이나 하는 짓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말하더라도 타인이 상처 받으면 사과해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결과론적 태도가 무조건 옳은 건 아니지만, 때로는 그 결과로 인해 누군가와의 협의나 조정이 필요하다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게 공동체 구조의 기본 틀이다.
"내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니 사과하지 않을 건데?"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말 이후에 관계는 딱 거기까지다.
사과를 하지 않음은 단순히 내 자존심의 영역 밖의 문제에 가깝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진 감정선들 마저도 타인과 맞닿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늘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 이 때문이다.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타인이 받아들이는 그때의 정서를 고려해야 하는 것.
그게 안돼서 상당수의 부부들이 이혼을 택한다. 머리로는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조직생활을 해보면 알겠지만 정의와 논리보다는 누군가의 양보와 물러섬이 더 많이 필요하다.
사는 건 그렇다. 절벽 끝의 아주 작은 발판 위에 여러 명이 껴안고 있는 형태라고 보면 된다.
나 혼자 편하자고 주변 사람들 다 떠밀어버리고 서있으면 결국 혼자남을 뿐이다. 그렇게 살 거면 무인도 가서 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내가 그 발판을 만들었든, 그 발판을 내 돈 주고 금으로 만들었든,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면 나도 한 발 때고 상대방이 서있을 공간을 내어주는 것.
그게 함께 사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남 탓이 아닌 내 탓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는 끈끈하다.
어떤 현상이 발현되기까지 셀 수 없이 작은 복합적인 작용한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서로 미리 인지할 수 있다면, 함께하기 위해 양보는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만 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미리 예견하고 대비할 수 없다. 그래서 유연성이 필요하다.
양보와 배려하는 행위를 미덕보다는 유연성의 스킬 정도로 생각하는 건 어떨까.
억지로 쿨하자는 게 아니라, 쿨해야만 함께 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