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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터뷸런스 Oct 13. 2019

난 잘못한게 없습니다.

내 잘못으로 내가 고통받고 있다는 상상은 착각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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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의식이 심했었다. 그래서 누군가 조금만 속닥거리거나 나를 쳐다봐도

"내가 뭘 잘못했나?" "나에 대해 욕하는 건가?"라고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기억이 있다.

아주 작은 반응들을 통해 나의 존재에 대한 가치가 오락가락하는 건 참 괴로운 일이다. 

실제론 단지 내가 멋지지 않았을 뿐이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진 않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타인이라는 대상은 나에 대한 평가 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 봐야 보이는 몇 개의 모습, 말 몇 마디, 행동 몇 개 정도가 전부이기 때문에.

과연 그 정도를 목격했다고 해서 타인이 나를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최근 가장 많이 바뀐 점은, 생각보다 사람들에게 연락을 많이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전에는 누군가의 관심을 얻어보려고 연락을 했었고,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하지 않는 것뿐이다.  


물론 현명한 와이프라는 존재는 친구 수백 명을 대신하고도 남을만한 의지의 대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보다 나와 깊은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굳이 접점을 만들려는 시도가 없어진 건 내가 변해서가 아니라

원래의 나로 돌아가게 된 것.


나는 말을 하기보다 글 쓰는 것을 더 좋아한다. 다양한 액티비티보다 조용한 음악을 함께 듣는 것을 선호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유지가 가능한 관계는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애초에 "폭넓은 인간관계"라는 명제는 타인에게 적합한 워딩이었지, 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나를 잘 몰랐던 거다. 그래서 예전에는 타인들이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 나 자신과 친해지지 않는 것을 선택했었다.


지금은 타인들의 니즈에 나를 대입시키기보다 내 자아의 편향성에 중점을 둔다.

수백 개의 객관적 기호보다 단 하나의 주관적 사고가 나를 있어야 할 곳으로 가게 만든다.

남들이 뭐라 하든 어떻게 보든 그건 두 번째 문제다.


나는 "남들이 보는 나" 보다 

"내가 보는 나"가 더 중요하고

이제는 "나도 모르는 나"에 대해 들여다보는 시간 속에 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한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면밀히 본 적이 있는지? 

이러한 관찰자의 구도는 나 자신의 부족함과 나약함, 보강되어야 하는 부분을 노골적으로 확인하게 만든다.

내게 필요했던건 타인의 관심이 아니라, 관심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만든 결핍된 부분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타인의 생각과 결합되지 않되 관계로서는 융화한다.

모든 요구를 수락하지는 않되 굳이 전부 거절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부정적 감정도 느끼지만 그것 자체로 떼어놓고 본다.

너의 생각과 감정이 내게 전달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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