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도 부모다.(2)

시부모님과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

by 배움이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명절 이후로 이혼율이 급증한다고 한다.


기혼 여자들 사이에서 그 '명절'은 어마어마한 이슈라는 것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기에 남편과 연애시절 남편 원 가족의 '명절' 문화는 어떠한지 유심히 살펴보았다.


어깨 너머로 봐도 남편의 명절은 바빠 보였다. 늘 명절 당일은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가는 듯 하였다.


나는 호기롭게 선언하였다. "우리는 결혼하면 명절 때 각자 집을 번갈아가며 먼저 가는거야!" 라고 외쳤다.


그 이유인 즉슨 우리의 신혼집은 경기도, 시댁은 불과 1시간 거리의 같은 경기도 였지만 친정은 서너시간 거리의 지방이기 때문이었다.


매번 명절 당일에 시댁을 가게되면 짧은 연휴인 경우 친정을 가지 못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나는 원래 명절 당일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진도에 계신 외조부모님을 뵙고 오곤 했었는데 그 문화에서 영영 빠진다는게 너무나 서운하고 아쉬웠기 때문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명절에는 늘 친할머니댁이 아닌 외할머니댁을 갔는데, 이게 엄청난 사실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주변에서는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엄마를 부러워 하곤 했다.

먼저 돌아가신 친할아버지를 대신해 작은 할아버지가 내려주신 결정이었다고 한다. 진도에는 식구가 적어 어르신들이 적적하시니 진도로 가라고 하셨다고 한다.)


여튼 나는 명절 두 번 중 한 번이라도 내 친정엘 먼저 가겠다고 나름 합리적인 제시를 당당하게 했으니 그 제안이 당연히 받아들여질 줄 알았고, 내가 만났던 시부모님은 너무도 좋으신 분들이라 당연히 그 제안대로 흘러가리라 예상했다.



어떠한 돌풍도 예상치 못한 채로 결혼식 후 첫 명절이 다가왔다.


첫 명절이니 명절 당일엔 시댁에 있기로 했고, 남편이 그 바쁘게 드나들던 제사에 나도 참석하기로 했다.


명절 당일 전날에 시댁에 도착했는데, 흡사 전쟁터에 나가기 전처럼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원래 며느리 보면 며느리만 보내는 사람들도 많아~ 그래도 첫 명절이니 같이 가고 내일 새벽 6시쯤 출발해야 해~"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저는 사과도 잘 못깎는데 괜찮을까요?" 라며 불안하고 걱정되는 기색을 내비쳤다.


"괜찮아 ~ 나 있잖아~"라며 어머니는 안심시켜 주셨다. 그런데 마음속으로는 자꾸만 의문이 들었다.


'시누이는 집에서 쉬는데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이 되어 새벽같이 큰댁에 갔다. 가면서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어제 미리 음식 장만 해놓고 와서 가서는 차리기만 하면 돼~"라는 말이 안심이 되었다.




큰댁에 도착했다. 다들 결혼식 때 뵙고 처음뵙는 얼굴들이라 반가움을 표할새도 없이 큰 어머니는 나에게 앞치마 몇개를 주시며 "마음에 드는걸로 입어~"하셨다.


그러고는 부엌에서 장장 반나절동안 설거지를 하고, 제삿상을 차렸다.


내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정작 '이'씨 성을 가지신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우리 시아버지는 쇼파에서 앉아 티비를 보시고, 담소를 나누실 뿐이었다.


'이'씨 성 중 남편만 유일하게 안절부절하며 부엌을 못 떠났다. 그런 모습을 보며 큰 어머니는 우습다는 듯 "왜~ 마누라 아까워?" 하셨다.


중간 중간 큰어머니와 둘째 큰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담소도 나누고 하셨지만 나와 우리 어머니, 큰형님 셋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다리가 저려오고 허리가 아파왔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부엌에 있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결혼하고 처음 뵙는 자리인데 앞치마에 고무장갑이라니. 말로만 들으며 나는 그럴일 없을거라는 호기롭게 장담했던 일들이 현실이 되어 앞에 펼쳐져 있었다.


힘들게 제사상을 다 차린 후였다. '하 이 많은 걸 해냈네..' 싶은 생각도 잠시 큰 아버지는 큰 형님께 호통을 치셨다.


"위치가 이게 아니지~~!!" "동쪽엔 뭐가 와야하고.. 서쪽엔 뭐가 와야하고.."


마음속에서 부글 부글 뜨거운 용암이 치솟았다.


제사를 드린 후에 식사를 하는데 정말 표정관리가 안되었다.


남자들은 거실에서 큰 상을 차려 식사를 하고 여자들은 부엌도 아닌 거실도 아닌 어딘가에서 상을 펴고 여자들끼리 밥을 먹었다.


밥도 먹고 싶지 않고,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런건줄 정말 몰랐다.


제사 문화야 당신들께서 계속 해오시던 관습과 전통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존중하는 마음이지만, 왜 이 곳에서 여자들만 일을 해야하는지, 남자상 여자상 구분해서 밥을 먹어야 하는지.


어머니는 이런 모든 것을 아시고도 시누이는 집에 두고 나를 굳이 데려오신건지, 정말 결혼생활이 이렇게 치사한건지 별별 생각이 다들었다.


수치스러웠다.


밥을 먹고 나면 늘 아빠가 고무장갑부터 끼는 우리집 문화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나도 귀하게 자랐고, 배울만큼 배웠고, 남편과 똑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고, 남편과 똑같이 벌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결혼 할 때 시댁에서 지원을 조금 더, 아니 조금 더 많이 해주셨다는 것.


나는 취직하자마자 학자금 부터 갚아야 해서 겨우 원룸 전세 자금만큼 돈을 모아 결혼 비용을 보탰다면

남편은 아버님께 용돈을 받으며 월급은 다 모아서 나보다 많은 결혼 비용을 보태주었다. 물론 감사하고 정말 고맙다.


그런데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하는 게 결국 '돈'때문이라면 너무도 치사한 것이었다.


당장에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제사를 끝나고 성묘에 가야하는 남자들을 뒤로하고 어머니와 나만 다시 시댁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끝내 참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뱉었다. "어머니. 너무 낯설어요. 이런 문화요. 저는 아버지가 늘 식사 후에 고무장갑부터 끼셨어요."


라고 했다. 사실은 그런 대접을 받을거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굳이 데려간 어머님에 대한 원망도 섞여있었다.


너무나 울분섞인 마음에 어머니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약간의 '창피함과 미안함'이 섞인 말씀이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대답을 듣고 조금 진정을 찾자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가 안쓰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당신은 어떻게 이걸 몇십년동안 하시고는....' 하는 마음이 들어 존경스러움과 한편으로는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폭풍우 같은 첫 명절을 보내고 나는 다짐했다. '그래 앞으로 제사에 안가려면 아기를 얼른 가져야지'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으면 이제 더이상의 폭풍우는 겪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것도 여전히 명랑한 새색시의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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