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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Jul 25. 2024

프롤로그

첫 단추를 잘 못 끼웠지.

“엄마, 엄마는 그 힘든 시절 어떻게 살았대?”

“높은데 쳐다보니 모가지가 아프고, 옆으로 돌아보니 내가 제일 못 나 보이잖아. 그래서, 아래만 보고 살았지. 나보다 못 한 사람들 보면서. 미안한 말이지만 당신들보단 내가 낫소. 그러면서.”


우리 엄마는 딸 셋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다. 평생 빚에 쪼들리고 남편은 생활비는커녕 자기가 벌인 일 뒤처리도 제대로 못 해 늘 엄마의 몫으로 돌려버렸지만, 그런 상황에 닥쳐도 항상 방법이 있을 거라는 분이었다. 고등학생 때로 기억 한다. 아빠가 한참 유한회사를 차려서 건축일을 한답시고 인부를 사서 여기저기 조립식 건축물을 짓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현관에서 벨도 아니고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엄마가 무슨 일인가 싶어 열었더니 덩치 큰 남자 둘이 구둣발로 집안에 들어와서는 아빠를 찾았다. 아빠는 없고, 딸 셋은 이 상황이 무슨 일인가 싶어 눈만 동동거리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밀린 돈을 못 받았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집 안을 돌아다닌다. 엄마는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며 단호하게 말하고, 밀린 금액이 얼만지 물었다. 백만 원이었다. 엄마가 내일까지 그 돈 해 드릴 테니 지금은 돌아가시라 내가 약속하겠다. 하고 돌려보냈고, 10분이나 지났을까? 그들이 나간 걸 확인이라도 한 냥 당당하게 들어오던 아빠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빠와 엄마가 바뀌었더라면 우리집은 좀 더 안정적이고 평화로웠을까? 어릴 때 그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던 거 같다. 엄마는 여장부였고, 아빠는 겁쟁이였다.     


아빠와 엄마는 동향 출신이다. 경남의 어느 섬마을에서 태어났고 외할아버지의 주선으로 두 분이 만나셨다고 했다. 큰외삼촌은 아빠의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안 된다고 펄쩍펄쩍 뛰셨고, 그럼에도, 예의 바르고 상냥했던 아빠는 외할아버지의 이쁨을 받아 엄마의 짝으로 낙첨되었다. 그때는 흔한 일이었다. 중매로 만나 한 두어 달 연애하다 결혼하는 게 일상다반사였던 시절이다. 엄마도 아빠의 고운 얼굴과 식구 많은 집에 장남이 아니라 막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시댁살이가 고달팠던 시절 아닌가? 형제간 우애 좋고, 할머니 심성도 고운 분이셨기에 외할아버지 생각엔 괜찮다 싶었겠지.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놓치고, 큰외삼촌은 알아챈 것이 있었다. 아버지는 형제 많은 집, 그것도 나이 차가 많은 형제 중에 막내였다. 큰외삼촌의 촉이 딱 들어맞았다. 의존형 인간. 그러면서 고집 센. 떼쟁이 막내. 큰외삼촌이 마뜩잖아서 엄마에게 큰외삼촌의 친한 친구를 중신 선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빠는 엄마를 끈질기게 찾아왔고, 우리 엄마는 아빠의 번지르르한 외모와 상냥함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그때 그분 만나라도 보지 왜 그랬냐고 장난이라도 치면,

“내가 내 발을 도끼로 찍었지. 첫 단추를 잘 못 끼웠지 뭐. 어쩔거고. 40년을 살아버렸는데. 그래도 아빠다. 함부로 하면 안 돼.” 장난을 받아치면서도 항상 끝에는 아빠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 준다. 어릴 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세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이해가 된다. 우리 엄마가 왜 그런 말을 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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