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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Aug 01. 2024

엄마 허벅지에 남은 악몽

험난했던 산골 외딴집 살이

나는 그 사진 너무 싫다.
그때 니들 막내외삼촌이 내 사는 거 보고
울면서 갔다이가.


우리 엄마가 유독 싫어하는 사진이 있다. 논두렁에 앉아서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뒤돌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아마도 엄마의 눈 끝에는 우리 세 딸이 있었을 것이다. 논에서 우렁이 잡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던 우리를 그 와중에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장면이 아빠의 눈에 들어왔겠지. 그 사진을 찍고 얼마 후, 엄마는 아빠가 모는 경운기를 타고 장에 다녀오다가 고랑으로 떨어져 허벅지에 큰 상처가 났다. 악몽을 꿀 정도로 큰 사고였다고 엄마는 기억하지만, 아빠는 그 얘기가 나오면 별 일 아니었다는 식으로 흘려버린다. 동상이몽도 아니고, 지금도 엄마 허벅지엔 그때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막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서 한참 중동지역에 건설 붐이 일고 있었다. 아빠는 다니던 회사에서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다는 말에 지원했고, 세 딸과 엄마를 두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때만해도 꽤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갑자기 떨어져 살게 된 그리움 때문인지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씩 딸 셋을 데리고 우체국으로 향했고, 우리의 사진과 구구절절한 글들을 적어서 사우디로 보냈다. 두 분이 극진히 서로 사랑했다기보다는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아빠에게 딸들의 성장을 함께 하기 위한 엄마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딸들의 사진은 홀로 지내는 아빠에게 취미생활의 모티브가 되었고, 사진에서 그림으로 옮겨진 딸들의 모습은 모래 바닥 위에서 멋지게 선글라스를 끼고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찍은 아빠의 사진과 함께 매달 한국으로 보내졌다. 그렇게 3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아빠의 월급은 엄마가 꼬박꼬박 모아 목돈을 만들었다. 아빠의 고생이 안쓰러웠던 엄마는 빈 방에 하숙을 치고,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거리를 어디선가 구해왔다. 한시도 가만히 못있는 성격이 이때도 있었나보다. 부업거리 중에 제일 많이 한 일이 와이셔츠 실밥따기였다. 수북이 쌓인 와이셔츠 뭉치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상하게 생긴 가위로 실밥을 따다 보면 누워 있는 막내의 얼굴 위로 실밥들이 날아들고, 그걸 또 나와 연년생 동생은 재밌다고 주우러 다녔다. 엄마는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아빠의 고생을 가족의 희망으로 바꾸고 있었다. 그렇게 모은 돈이면 당시 20평대 신축 맨션 하나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엄마 생각엔 무조건 부동산을 사야한다 싶었다나. 그 선견지명에 지금도 감탄한다. 어쩌다 가족이 다 모이는 날이면 그 얘기는 빠질 수가 없는 단골 에피소드다.


"문디 나그네! 그때 마산만 안 갔어도 지금 내가 이래 안 살 건데."

 

사진을 보며 깔깔거리다가도 어느 지점에선 항상 원망이 눈물로 흘러 악몽같은 시절의 기억은 마무리된다.  결혼하기 전에는 또 시작이다 싶어서 다른 말로 돌리기도 했다. 시골에서 마음껏 뛰어놀던 천진난만했던 유년기. 덕분에(?) 나는 피아노도 배우지 못했고, 유치원도 다니지 못했지만, 나쁘지 않은 추억이었다. 아빠가 만들어 준 춘향이 그네도 있었고, 여름이면 아무도 없는 너른 마당에 갈색 고무통에 물 받아서 물놀이하던 추억이 있는 그리운 곳이었기에. 그런데, 내가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그 얘기를 다시 들으니 알 것 같았다. 그때 엄마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하루아침에 날아간 꿈. 아이들의 미래까지 송두리째 사라진 끔찍함. 엄마의 산골살이는 한 많은 시절 중의 일부분일 뿐이지만, 그 시절만의 아픔이 있는 법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엄마만의 서러움. 어찌 내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엄마가 차곡차곡 맨션의 꿈을 갖고 모아둔 돈은 하루아침에 축사로 바뀌었고, 졸지에 우리 가족은 산 아래 집 한 채 딸랑 있는 산골 외딴집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아빠는 엄마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마산에서 크게 낙농업을 하시던 큰 아버지만 믿고 근처(근처라고 해봐야 차로 30분 거리다)에 가장 싼 땅에 축사를 짓고 소 10마리를 사서 무지의 땅으로 뛰어들었다. 소만 키울 수 없으니, 수박도 심고, 벼농사도 하고.  하여튼 별 걸 다 키웠던 걸로 기억한다. 뽕나무 아래, 옥수수밭, 수박밭등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아빠는 그때가 좋았을까? 학교 입학하기 전에 산골을 뜨겠다는 엄마의 계획과는 달리 나는 분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학교가 너무 멀다 보니 아빠가 아침마다 데려다주고, 마칠 때 데리러 왔었다. 논길, 산길을 동생이랑 아무렇게나 지은 노래를 부르며 아빠 뒤를 졸졸 따라 이 풀은 이름이 뭐예요? 물으면 척척박사같이 대답을 하던 아빠가 기억난다. 그렇게 30분은 걸어야  집이 나온다. 개구리는 기본이고, 뱀이란 뱀은 그때 다 본 거 같다. 한 번은 옛날식 집이라 아궁이가 있던 정지(경상도 사투리, 부엌)에 새끼 고라니가 들어와서 며칠 기거했던 적도 있다. 우리에겐 추억이지만 엄마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섬마을 출신이지만, 어업도 농업도 하지 않던 잘 사는 집의 딸이었으니까.


그렇게 우리의 산골 살이는 어찌어찌 이어져 가는 것 같았다. 애지중지 키우던 소들이 죽어나가기 전에는.

왜 죽는지 알 수가 없었단다. 전염병이 돈 것도 아니었다. 큰 아버지가 와서 봐도 외관상 이상이 없으니, 그냥 지켜보자고만 하고,  수의사도 곧 오지 않았다. 소를 보는 의사가 많이 없어서였을까? 뭐 하여튼, 이유도 모른 채 정성 들여 키운 소들이 한 두 마리씩 죽어나가면 엄마는 그 아이들이 불쌍해서 울고, 우리는 엄마가 우니까 따라 울었다. 너무 산속 깊은 곳이라 수의사도 꺼리는 그런 곳에 왜 축사를 지었는지. '아무리 싸도 그런 건 알아봤어야지. 대책 없는 양반.' 그렇게 이 삼일동안 우리 집에 있던 젖소는 거의 죽었고 한 두 마리 남았을 때야 수의사가 왔다.


"너무 많이 먹였네요. 배 터져 죽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후에 물으니, 주는 대로 받아먹으니 이뻐서 계속 줬단다. 허허거리며 이야기하는 아빠에게 할 말을 잃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럼에도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그때 공부만 좀 했었어도 지금 소 100마리는 넘게 키우고 있을 거라며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진정 문디나그네다.


지나간 과거는 뭐든 추억이 될 수 있을까? 같은 상황이지만 누구에겐 최악의 기억, 또 누구에겐 미련, 또 누군가에겐 그리운 추억이 된 산골마을에서의 2년의 시간은 뭐든 할 수 있다는 한 남자의 무식한 용기가 불러온 우리 집의 흑역사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잘 모를 때는 가장 안전한 것을 선택하라.
잘 모를 때 위험을 감수하면 파멸을 자초한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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