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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Aug 08. 2024

눈물 어린 연금

우리 엄마는 공무원이었다.

새벽별 보고 출근하고
밤에 달뜨면 퇴근하는데
얼마나 서럽던지...


엄마의 단골 회고에피소드 중에 하나다. 어릴 때에는 이 말이 너무 듣기 싫었다. '엄마니까 당연한 건데 생색 좀 그만 내지!' 그런 생각도 했었다. 얼마나 철없디 철없던 딸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창피하지만 되돌릴 수가 없다. 시간이란, 늘 나에게 후회라는 감정을 먼저 가져다준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만 그 시간으로 조금만 되돌릴 수 있다면 덜 미안할 수 있을까? 당연한 게 아님을 이제는 아는데 되돌아갈 수 없어 사무치는 후회를 오십이 다되어 맞닥뜨렸다. 심지어, 지금도 떳떳하지 못한 딸로서 고개 숙이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 그지없고, 그렇게 듣기 싫었던 엄마의 고생스토리는 이제 공감하며 맞장구치는 이야기가 되었다. '아이고, 그때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가 아나.'로 시작해서 결국은 눈물바람이 되어 버렸던 지난날의 한탄을 어느 순간부터 옛날 이야기 하듯 덤덤하게 꺼내는 엄마를 보며 그렇게라도 힘들었던 그 시간을 지워나가 주길, 그리고, 현재진행형인 나의 미안함도 그렇게 지나가버린 감정이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말이다. 

우리 엄마는 6급 공무원으로 퇴직하셨다. 산골살이 하다가 갑자기 웬 공무원인가 싶겠지만, 우여곡절 많았던 엄마의 삶에 어쩌면 해님달님의 동아줄처럼 이어진 한 번의 기회가 있었다. 썩은 동아줄이었더라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엄마는 그 동아줄에 죽기 살기로 매달렸고, 우리는 엄마의 온몸을 부여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는 꼴이었다. 


산골 살이를 정리하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지만,  남아있던 소 몇 마리를 헐값에 처분하고, 두 분 수중엔 몇백만 원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사글세(보증금 없이 매달 월세만 내는)라는 게 있어서 어찌어찌 정착은 했지만, 직업도 없고, 세 아이를 데리고 막막 그 자체였을 것이다.

'****산 73번지'

앞 주소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것만 또렷이 기억이 난다. 한 마디로 산동네였다. 산골을 벗어나 다시 산동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온 가족이 가까운 여관방으로 피신했다. 집 뒤에 있던 옹벽이 약해서 무너져 내렸다. 방 안에 들어온 지네에 물려서 동생 손가락이 퉁퉁 부었던 적도 있었다.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덕선이가 살던, 딱 그런 집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덕선이네는 평지였고 우리 집은 산 동네였다.


그때 또 아빠가 예상치 못한 일을 벌이신다. 일명 요꼬라고 하는 편직기계였는데 두 분이서 하루 종일 서서 기계를 왼쪽에서 오른쪽, 아니 반대였던가? 그렇게 왔다 갔다 움직이면 스웨터의 한 부분이 만들어졌다. 가내수공업이었다. 사글세와 육성회비, 생활비 정도는 됐겠지만 큰돈은 되지 않았을 거고, 그마저도 공장에서 대량화되는 바람에 일거리가 줄어서 결국 그만두셨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얼굴이 뽀얀 데다 공부도 아주 잘했다. 옷은 늘 깨끗했고, 항상 단정했다. 4학년 때 반장을 맡았었는데 친구들 집에 생일파티 초대를 많이 받았었다. 그러던 중 2층짜리 집(잔디정원이 예쁘게 정돈된-기생충에 나오는 집보다는 훨씬 작은)에 사는 친구의 생일파티에 다녀온 뒤로 가난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산 73번지를 들킬까 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아이들이 뒤를 밟을까 봐 동네를 빙빙 돌아 집에 가곤 했다. 아무도 내가 가난한 집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가난한 집의 아이였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힘에 늘 눌려서 그 사실을 감추며 살아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난이 잘못이 아님을 그때 깨달았다면 지금 나는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는 MPTI 대문자 E에 혈액형도 대문자 O형이다. 친화력으로 우리 엄마를 따를 자 없고, 통 크기로도 우리 엄마를 이길 자가 없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나라의 큰 일을 할 인물이라는 사주팔자를 타고 난 사람이다. 요꼬기계를 다 처분하고, 아빠는 다시 건설업계로 돌아가 돈도 안 되는 일을 벌이기 시작했고, 엄마는 주변 인맥들을 총동원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친하게 지내던 지인의 남편이 교육청 공무원이었는데 그때 10급 기능직 공무원을 몇 명 뽑으니 이력서를 들고 찾아가라고 했단다. 엄마는 돈봉투(지금도 가능하겠지만(?) 그때는 더 통했다)와 함께 이력서를 들고 그분을 찾아갔고, 순식간에 10급 기능직 공무원이 되었다. 

말이 좋아 공무원이지 용역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경쟁이 치열해서 지인찬스가 없었다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생전 처음 해보는 청소일에 매일 녹초가 되어 왔을 텐데도 뭐 하나 놓치는 거 없는 워킹맘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가난한 티를 내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교육청 청소, 청소년 수련원 청소에 영양사 보조까지, 부산 시내 웬만한 교육 시설은 우리 엄마 손을 다 거쳤을 것이다. 특히나, 집에서 거리가 멀었던 **교육청에서 일할 때는 새벽 5시에 집에서 나가서 밤이 돼야 집에 오는 일이 흔했다. 거들떠도 보지 않는 아침 밥상에 세 딸 도시락까지 싸놓고...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일 벌이는 데는 선수인데 마무리에 약한 아빠는 경제적으로 늘 무능력했다. 심지어, 밴댕이 소갈딱지 심보를 가진 양반이라 돈 벌어 오는 엄마에게 자격지심만 쌓여 갔고, 엄마의 퇴근이 늦어지는 날이면 그의 자격지심은 의처증으로 이어졌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생트집을 잡는 아빠에게 진저리가 났다. 술의 힘을 빌려 자신의 자존감을 찾으려 했던 아빠는 매일같이 엄마를 몰아세웠고, 보다 못해 내가 나서 대들고 나야 끝이 났다. 엄마에게서 나에게로, 또는 동생에게로 이월이 되어야만 아빠의 화는 수그러 들었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빠져나갈 길이 없는 동굴 같았다. 벗어나려니 엄마가 가엽고, 버티자니 내가 미칠 거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엄마 입장이 아닌 내 입장만 중요했다. 시끄러운 아빠를 진정시키려면 나설 수밖에 없었고, 엄마의 심정 따위는 내 소관이 아니었다. '나는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났을까?' 원망만 가득했던 시절이다. 아빠와 가난, 그리고, 벗어날 수 있음에도 벗어나지 못하는 엄마에게서도 벗어나고 싶었다. 

서울로 가고 싶었다. 당시 세종대학교 관광경영학과에 가고 싶어 원서를 쓰려고 했는데 일류대가 아니면 못 보내준다는 아빠와 또 부딪히고 말았다. 게다가, 여자 혼자 살면 어쩌고 저쩌고 조선시대에나 들을 법한 이유로 나의 탈출구는 원천봉쇄되어 버렸다. 아빠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정도까지 올랐다. 결국 아빠가 원하던 지방 국립대 본고사 치는 날, 나는 그 시험장에 가지 않았다. 어리석게도 그게 아빠한테 복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현명하지 못했고, 비겁했다. 그렇게 나의 사춘기는 20대에 접어들어 최고조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매일 싸웠고, 그러면서도 다음날 아침 아빠 밥상을 차려놓고 나가는 엄마가 징글징글할 정도로 이해가 안 됐다. 


"엄마, 이혼해라. 왜 그러고 사노?"


"됐다. 이혼은 무슨. 너거 아빠 저러는 게 하루이틀이가. 너거보고 살지. 그래도 아빠한테 함부로 하지 마라." 


그냥 헤어지면 될 것을. 우리가 괜찮다는데 왜 저러고 살까? 지금 생각하면 우리 엄마는 별 보며 울고, 달 보며도 울지 않았을까? 당신보다 못 한 옆집 언니를 보며 '그래도 저보단 낫지.' 스스로 달래가면서. 엄마는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불행이라는 놈이 언제가 행복으로 바뀔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엄마는 하루하루 조그만 일에도 감사해하며 희망의 싹을 틔우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쩌겠노. 그래도, 다행아이가? 이래라도 사는 게 어디고?" 


행복의 기준이 너무 낮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문처럼 외우는 나름의 치유법이었을까? 엄마는 열심히 일했고, 모든 곳에서 인정받았다. 엄마의 노력과 고생이 담긴 학자금 대출금은 못난 딸들의 대학졸업장이 되었고, 나는 감사함도 모른 채 결혼이라는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 빠져나왔다. 엄마는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우리의 학자금을 갚아나갔고, 연금의 일부분을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종이조각과 맞바꾸었다. 그 빚이 20여 년의 시간 동안 엄마의 숨통을 얼마나 조았을지 상상도 못 하는 못난 딸을 보며 당신은 얼마나 서럽고 서러웠을까? 


24년이라는 시간을 녹여내고 퇴직하던 날, 그제야 엄마의 힘들었을 시간들이 눈에 보였다. 


"그래도 엄마 대단하제? 10급 기능직으로 들어와서 6급으로 퇴직하는 거 안 쉽디!"


만감이 교차해서 눈물 한 방울 날 법도 한데, 꽃다발 속에 얼굴을 파묻고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모습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당당해 보이지만 그 순간, 엄마의 눈앞에 얼마나 많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을까? 미안함과 감사함. 그리고, 바닥에 닿으리만치 부끄러웠던 그때의 미안함은 여전히 나에게 모진 채찍질이 되어 나를 아프게 한다. 철없던 나는 '세상 모든 엄마들은 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당연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모든 엄마들이 그렇지 않다는 걸 세상을 통해 알게 되면서 내가 그녀의 딸임이 그제야 자랑스러워졌다. 

그렇게 힘들게 모은 연금을 이제 본인만을 위해 써도 될 텐데 지갑 속에 현금한 장 남기지 않고 내 손에 쥐어주며 아직도 못 해준 게 많아 미안하다고 한다. 언제쯤이면 엄마의 마음이 다 이해가 될까? 아직도 물음표만 가득한 엄마의 삶에 대해서 나는 언제쯤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까지 불안해하는 대신 결국 모든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사는 데 익숙해진다면 더 높은 차원의 자유와 지혜에 도달할 수 있다. 미래를 통제하고, 예견하려는 헛된 시도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럴 용기가 있다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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