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묻어 두는 게 진리다.
우리 그거 한 번 만들어볼까?
가난뱅이 빵?
명절에 온 식구가 다 모이면 옛날 이야기는 단골 이야기 소재다. 언제였더라. 추석이었던 거 같은데 한참 예전에 누가 누가 더 못났던가에 대한 상호비방을 한참 하던 중 갑자기 동생이 "우리 그거 한 번 만들어볼까?"
라고 말을 꺼냈다. 셋은 동시에 "가난뱅이 빵!!"이라고 외쳐 빵 터졌던 기억이 있다.
우리 자매들에게 일명 가난뱅이 빵으로 통하는 엄마표 추억의 간식. 당시에 새우깡이 100원이었던 시절이다. 아이가 셋이다 보니 엄마는 새우깡 3봉지보다 가성비 좋은 간식을 자주 만들어 주셨는데 그중에 단연코 1등이었던 게 일명 가난뱅이 빵이었다. 우리가 어른이 되어 붙인 이름이라 그렇지 도넛 같은 종류라고 생각하면 제일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밀가루 반죽에 설탕과 소금을 적당히 넣고 내 맘대로 빚어서 기름에 튀기면 끝! 엄마가 반죽을 만들어주면 세 자매는 각자의 개성을 살려 요상한 모양으로 만들어 각자의 이름을 붙이고, 엄마는 조심스레 그것들을 주방에서 튀겨내 왔다. 이게 내 거야 하며 찾아 먹는 재미까지 쏠쏠했으니 어린 마음에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간식거리였다. 갓 튀겨 나온 밀가루향은 한참 먹고 싶은 게 많던 우리 입맛에 딱이었고 설탕까지 솔솔솔 뿌리면 천국의 맛이나 진배없었다. 그 외에 밥솥으로 카스텔라를 만들어주시기도 했고, 막걸리를 넣고 술빵까지 척척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SNS도 없던 시절 우리 엄마는 그걸 다 어디서 알고 해 주셨던 걸까? 본인도 기억이 안 난다니 출처는 영원히 미제의 늪으로 빠진 채 기억과 함께 옅어지는 중이다.
그렇게 다들 나이 사십이 다 되어 가던 어느 추석날, 자매 셋은 팔을 걷어붙이고, 그때 그 맛났던 간식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준비물은 아주 간단하다. 엄마의 기억까지 더해 계란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밀가루와 계란, 설탕, 소금, 튀김유 준비 끝! 성형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되직하게 반죽하고 그걸 꽈배기처럼 꼬으고 동그라미도 만들고, 막대기처럼 빚고 각자 만들고 싶은 대로 그때의 내공을 살려 완성하고는 하나씩 기름에 튀겨냈다. 기억 속 가난뱅이 빵!! 딱 그대로였다. 신발도 튀기면 맛있다지 않았나? 튀김의 고소한 냄새에 마음이 급해졌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하나씩 덥석 들고 호호불어가며 손에 쥐었다. 한껏 기대했던 터라 크게 한 입씩 베어 물고 일시정지. 다들 서로의 얼굴을 동시에 쳐다봤다.
"윽, 맛없어. 이렇게 퍽퍽했나?"
"뭐 빼먹은 거 아이가? 뭐가 빠진 거지?"
"야! 설탕 뿌려!!!"
급하게 설탕이 투입됐고 단 맛으로 업그레이든 된 가난뱅이 빵은, 결국 살아나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엄마가 만들어 준 대로 재현은 되었으나 빵지순례까지 마친 우리의 입맛에 자격미달의 맛이었을 뿐이다.
"엄마, 이게 그렇게 맛있었는데 이제 맛이 없다."
"당연하지, 그땐 뭐든 맛있지. 과자를 실컷 못 사주니까 엄마가 미안해서 그래라도 만들어준 거지. 밀가루만 튀긴 게 무슨 맛이 있겠노."
추억이 와장창 무너짐과 동시에 새우깡 하나 제대로 못 사준 엄마의 미안함이 그 밀가루 반죽에 녹아 있었을 생각을 하니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모두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퇴임도 했겠다 편히 노후를 보내야 하는데 그새를 못 참고 어린이집 급식소에서 일을 하던 때다. 실패한 빵이 못내 아쉬웠던 나는 괜히 엄마가 일하는 걸 트집 잡았다.
"엄마, 이제 일 좀 그만하면 안 되나?"
"내가 일할 수 있을 때 더 해야지, 너거한테 짐이 안되지. 딸년들한테 용돈 받고 살까?"
직설적 화법을 가진 그녀. 그 말에 셋 다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선뜻 내가 줄게라고 대답할 형편들이 못 되었다. 엄마는 그 기운을 눈치챘는지 웃으면서,
"너거가 준다고 내가 받나? 내가 줬으면 줬지. 너거돈 받고는 안 산다. 사위 눈치 보이게 함부로 생각도 하지 마라. 나는 집에 있으면 병나는 사람이다. 나가서 일도 하고 사람을 만나야 병이 안 나지."
우걱우걱 설탕 범벅인 가난뱅이 빵을 먹으며 아직도 자식들 앞에 짐이 안되려는 엄마의 진심이 느껴져 목이 메어왔다. 결국, 우리는 그 빵을 다 먹고, 집에 가서 소화제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그 궁핍했던 시절에도 엄마는 우리를 위해 늘 최선이었구나를 생각하니 내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하나 생각하게 된다. 큰 딸이 한참 사춘기로 내 속을 긁을 때 엄마에게 하소연했다가 되려 욕만 한바가지 먹은 일이 있었다.
"야, 니는 더했다. **이만큼 착한 아가 어딨노? 지 어릴 때 생각은 안 하고. 아를 잡아쌌노." 그와 동시에 내 통장에 5만 원이 꽂혔다. **맛있는 거 사주라는 카톡도 함께. 나는 아직 멀었다. 우리 엄마 따라가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