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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Aug 19. 2024

우리 엄마는 유쾌상쾌통쾌

방귀로 연주가 가능하다!

 캔디의 삶의 좌우명이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면 우리 엄마의 그것은 외롭고 슬프면 일단 운다이다. 그리고, 그걸로 끝. 감정을 절대 안으로 숨기지 않는 직설적인 성격.  하지만, 본인의 감정으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일은 절대 만들지 않는다. 철저하게 본인의 감정에 대해서 솔직하며 선을 넘지 않는다. 그래서, 현재의 감정을 미루고 과거를 떠올리며 우울의 늪으로 빠지는 경우가 없다. 울고 싶을 때 실컷 울고 그러고 툭툭 털어내는... 한 마디로 뒤끝이라고는 없는 쿨한 성격. 그래서 엄마는 친구도 많고 근무처를 옮기면 그곳에서의 인연들도 모두 귀하게 생각해서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여전히 잘 지내신다. 엄마의 성격을 물려받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세 딸은 꿍한 아빠의 성격을 고스란히 받고 말았다. (젠장)

 

 예전 산 73번지에서 시장에 한 번 가려면 산동네를 내려와서 큰 도로를 건너 편도 30분에 가까운 시간을 걸어야 했다. 그럼에도 시장에 가는 게 좋아서 엄마가 갈 때마다 쪼로로 따라가곤 했는데, 내가 초등학교 3,4학년때만 해도 도로가에 뽕뽀로마치라 불리던 빨간 집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어느 순간 모두 철거되고 없어졌지만 난 아직도 그 문 앞에 앉아 있던 여자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대낮에 누가 가나 싶지만 낮에도 문이 열린 곳이 많아서 시장을 가려면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지나가야만 했다.  유독 그 앞을 지날 때 엄마는 방귀를 많이 뀌었다. 우리가 질색 팔색을 하면 더 신나서 방귀로 박자까지 맞춰 가며 껴대는 통에 우리 자매는 부끄러워서 멀리 도망가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길 앞에서 우리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3, 4학년 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그걸 다 설명하기란 직설적인 엄마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원할 때 방귀를 뀔 수 있는 재능(?)이 있어서 그 외에도 우리를 많이 당황하게 했지만, 그렇게 한 바탕 도망가고 웃고 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물론 좋은 기억으로. 

그 뿐인가? 다 함께 모여 앉아 있으면 현관 쪽을 향해 '어서 오시다'라고 말하면서 꼭 누가 온 것처럼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장난을 친다. 이제는 장난임을 알지만 아직도 우리는 엄마의 장난에 속는 척을 한다. 그렇게 한 바탕 웃고 "세상 뭐 있나? 웃으면서 살면 되지."라는 엄마 말에 플라톤이고 니체고 다 무릎 꿇어! 우리 엄마의 삶의 기조인 유쾌하게 살자는 그 어떤 철학자의 말보다 더 깊은 울림이 있다. 


 한 번은 엄마가 모 초등학교에서 영양사 바로 밑, 그러니까 급식 조리원들을 총괄하는 일을 맡으셨을 때의 일이다. 엄마의 예리한 촉에 몇몇 조리원들의 가방이 퇴근할 때마다 불룩해지는 게 이상해서 그들의 사물함을 영양사 입회하에 급습한 적이 있다고 했다. 알고 보니 식재료들을 조리하기도 전에 빼돌려서 가방에 몰래 숨겨나갔던 것이다. 

"좀 봐주지 그랬노. 먹고살기 힘들어 그런 거 아니가?"

알량한 동정심으로 내가 한 마디 했더니 대쪽 같은 우리 엄마,

"금반지, 금목걸이 지 할 거 다 하고 다니면서 애들 먹을 걸 뚱쳐가는데 그게 나쁜 년이지. 어데 훔칠 게 없어서 애들 먹을 걸 훔치노. 나쁜 년들." 

하이고, 한 마디 했다가 욕이란 욕은 다 들었나 보다.  이 말을 그 현장에서도 똑같이 했다니, 조리원분들 얼굴이 어땠을지 상상이 간다. 처음엔 한 명이 그리고, 안 들키니 모두가 너도 나도 한 짐씩 들고나가니 아이들 급식이 모자랄 수밖에. 어쨌든 그 뒤로 조리원분들은 홀쭉한 가방을 들고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쁜 일이 그렇지 않은 일이 되는 건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 모였을 때이다. 소위, 동지가 생기는 순간 그건 범죄가 아니라 그냥 일탈이다. 동생이 경찰이 된 건 어쩌면 엄마의 그 예리함을 빼다 박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사건 이후 조리원분들과 사이가 틀어졌느냐? 여전히 잘 지내신다. 그게 우리 엄마의 장점이다.


 흑백 사진 이긴 하지만, 친정에 가면 70년대 당시 유행하던 나팔바지를 입고 머리는 굵은 웨이브를 하고 찍은 독사진이 있다. 지금 착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고 이쁘다. 열여덟, 열아홉쯤이었을 거라고 하는데 젊음이 있어서인지 지금 봐도 이쁘다. 하지만, 젊어서 이쁜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 엄마는 타고난 멋쟁이다. 월화수목금토일 같은 옷을 절대 입지 않고, 형형색색의 스카프들이 즐비하다. 목주름을 감추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그냥 우리 엄마는 스카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최근에 내렸다. 이사를 하려고 짐을 정리하다 보니, 옷이 많아도 너무 많다. 

"엄마, 이건 좀 버리자."

"야, 그게 내 **다닐 대 그 앞에 양장점에서 3만 원 주고 산 건데 아직도 입는다. 버리긴 뭘 버려."

"그럼, 엄마 이건? 3년은 안 입은 거 같은데."

"무슨 소리 하노! 며칠 전에도 입었다. 너거 엄마가 아직 세련되게 입고 다니니까 너거 어데 가도 안 꿀리잖아."

그건 맞는 소리다. 원래 이쁘기도 하고 옷도 늘 잘입고 다니니 나이보다 대여섯 살은 젊어 보인다. 내년에 칠순인데도 가끔 병원 데스크 간호사들이 엄마 나이를 보고 깜짝깜짝 놀란다나.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칭찬이다. 그래서, 그 병원을 이사 가고 나서도 계속 다니신다. 그런데, 문제는 옷이 많아도 너무 많은 거다. 이걸 갖고 가도 넣을 데가 없는데 최소 3년 동안 안 입은 거만 추려보자. 겨우 설득해서 옷을 버리는 데 성공했다. 언젠가 막내가 "우리 시어머니는 백화점에서만 옷 산다. 엄마는 왜 맨날 싸구려만 사노." 한 마디 했다가 모녀 사이 끊길 번 한 사건이 있었다. 막내는 이제 좀 살만 하니 옷도 좀 제대로 사서 입으라는 말이었지만, 엄마는 백화점에서 옷을 사 본 적도 없는 데다가 시어머니랑 비교하나 싶어 제대로 서러웠던 모양이었다.

"평생 일 한 번 안 해보고 살림만 한 사람이 백화점에서 옷 사 입고 팔자 좋네. 나는 그런 팔자가 못 돼서 만 원짜리 이만 원짜리 사 입는다. 왜?"

그때 그 서러움은 엄마가 살아온 지난 40년이 응축되어 한 동안 가슴에 맺혀 있었다. 뒤끝 없기로 유명한 엄마지만, 이 얘긴 아직도 하신다. 망할 지지배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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