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정아줌마 Dec 20. 2021

40, 시작하기 쉬운 숫자야!

3. 시작은 절대 반이 아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 지금 만나면 내 가만두지 않겠다고 달력에 쳐진 동그라미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세뇌당하다시피 자주 들은 말이다. 시작은 그냥 시작일 뿐임을 왜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걸까. 왜 시작이 반이라는 말로 나를 이렇게 어려운 고난에 빠지게 한 걸까? 이미 죽고 뼈 자국도 찾을 수 없는 양반을 매일같이 원망했다.


어떻게 2차까지 접수는 했다. 1차 시험 과목도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탠데 무슨 생각으로 2차까지 볼 생각을 한 건지.. 참 한심하다. 엎질러진 물이다. 어쩔 수가 없다. 


수험표를 인쇄하고 나서야 현실감이 왔다. 

1차 시험은 계속 모의고사 위주로 공부를 진행했다. 그리고 틀린 문제를 다시 풀면서 개념을 다시 짚어나갔다. 강의시간에 강사가 짚어 준 많이 나온다는 부분은 책이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 어미 하나만 바꿔도 이게 그 내용인가 싶을 정도로 민법은 지문 해석 자체가 어려웠다. 읽고 또 읽어봐도 아닌 게 아닌 게 아니었다는 식이다. 우리나라말인데 외국어보다 어렵다. 갑, 을, 병, 정.. 이해관계는 또 얼마나 얽혀있던지.. 하나하나 풀어가는 게 내가 무슨 판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럴 거면 진즉에 공부 열심히 해서 판검사 될 걸.. 그때는 젊기라도 했지.. 나이 40에 이게 뭐하는 짓이지..


동네 아줌마들이 커피 마시러 오란다. 오만가지의 핑계를 대고 한 달은 안 갔다. 

그랬더니 요새 뭐하길래 바쁘냐며 꼬치꼬치 캐묻는다. 좋은 거면 같이 하자부터 시작해서 일하냐는 말까지.. 두문불출 집에서 공부만 하고 있는데 남의 속도 모르고.. 하긴 하루 종일 들락날락 동네 아줌마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수다 떨고 마트 가고 그랬는데 갑자기 발길을 뚝 끊었으니 이상하게 여겨지는 건 당연지사다. 눈치채지 않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어쩔 수 없이 수다모임에 동참했다. 그래도 시험 준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험 친다는 말은 가족들에게도 주변에 절대 알리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렸다. 붙고 나서 말해도 되지 않나... 이때 나는 이미 불합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서너 달 만에 합격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거였다.


시간은 야속하게도 너무 잘 간다. 그렇게 6월 중순부터 시작된 공부는 넉 달을 꽉 채워간다. 이제 일주일 후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달력에 동그라미는 가까워지는데 머릿속은 뒤죽박죽 알던 것도 모르겠고 모르는 건 더 모르겠다. 이때부턴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거 같다. 반복적으로 문제 풀고 암기하고 기계적으로 공부했다. 


안 왔으면 좋겠던 그날 아침.. 각종 준비물과 점심 대용으로 먹을 빵, 물, 핫팩을 챙겨서 시험장으로 향했다. 

10월 말이니까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남편이 시험장까지 태워주겠다는 걸 무슨 큰일 한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택시를 탔다. 떨어질게 뻔하니까 미리 기대하지 마라고 당부도 해둔다. 


시험장 안을 둘러보니 나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이 제법 많다. 어라? 저 친구는 이제 20살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데? 저런 친구들도 공인중개사 시험을 준비하는구나.. 진짜 설 자리 없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4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까지 연령이 가장 많았다 그랬는데... 어쩌면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좀 더 일찍 시작해볼걸.. 의미 없는 후회도 든다. 






나는 결국 2차 시험을 보지 않았다. 


1차 시험을 무슨 정신으로 마무리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작년에 1차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 올해 1차 시험이 끝나자 시험이 치러지는 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과 크로스로 학교 밖을 빠져나갔다. 


무슨 기대를 하고 시험을 본 걸까? 설마 진짜 신이 나에게 합격이란 행운을 그냥 안겨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자신 있게 1차 시험을 통과하고 한 과목도 공부하지 않은 2차 시험을 찍기 신공으로 붙을 거라고 정말 생각했던 걸까? 민법과 부동산학개론 시험을 치면서 나는 여기 까지라는 걸 깨달았다. 진즉에 알았어야 했는데 내 교만과 무식함이 어이없는 자만심을 키웠던 건지도 모르겠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2차 시험은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제야 현실감이 들었다. 


그래, 달라질 건 없어. 내가 시험 친 건 우리 식구밖엔 모르잖아. 됐어.. 그냥 해프닝인 거야~

그렇게 애써 마음을 다잡고 집에 돌아왔다. 오자마자 책이며 모의고사 시험지들을 안 보이는 곳에 다 밀어 넣어버렸다. 이제 다시는 안하리라.. 마음먹으면서..


남편은 그런 내가 짠한 모양이다.. 뭐라도 해보려고 매일 열심히 공부한다고 애썼다며 술 한잔을 권한다. 떨어져도 괜찮다고 고생했다고 그 말에 괜히 울컥했다. 그래 이거라도 먹고 그냥 자자. 생각해본들 달라질 건 없다. 이미 내 OMR카드는 제출되었으니까.


작가의 이전글 40, 시작하기 좋은 숫자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