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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Sep 22. 2024

금주 175일째

추석이라는 고비를 넘겼다.

이게 가능하구나... 

내 인생 술 없이는 안 되는 줄 알았다. 저녁엔 하루가 마무리되었으니 마셔야 하고, 주말은 또 주말이니 마셔야 하고, 1년 365일 안 마셔야 할 이유가 없어서 주야장천 마셔왔는데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175일을 넘겼다. 

고비는 추석이었다. 당연히 아부지는 나에게 술을 권했고, "술 끊었다니까 아빠!" 했더니 "왜?"라고 되묻는 우리 아부지...아직도 술 없이는 못 사시는 당신에게 주당인 딸의 금주 소식은 청천벽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추석이면 으레 마주 앉아 소주잔을 부어가며 케케묵은 이야기보따리 한 번 풀어줘야 하는데 그걸 딸이 거부하니 이상할만도 하다. 아부지의 건강한 간을 물려받아서 감사하긴 하지만, 여하튼 나는 추석의 그 많은 음식과 많은 술 앞에서 이성을 찾았다. 사실, 이제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는다. 넉 달이 넘는 시간을 금주를 하며 보내보니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냥 흘러 보냈는지 또 한 번 자각하게 되어 슬펐다. 숱하게 보내 버린 그 젊은 날의 혼자만의 밤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멍하게 티브이만 바라보다 잠들고 또 반복되는 일상들. 나는 많은 시간을 그냥 버려버린 것이다.


 어젯밤 잠자리에 누워서 헤르만 헤세의 <삶을 견디는 기쁨>을 읽었다. '절제된 행동 습관은 "사소한 기쁨"을 내면에서 맛볼 수 있게 해 주어 쾌락을 만끽하도록 만들어 주는 능력이다.'라는 문장이 한 번에 꽂혔다. 술을 끊으면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처음에 그런 걱정을 했었다. 꽤나 오랜 시간 자리 잡은 음주의 시간을 대체할 만한 건 마땅히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시간에 다독을 했고, 많은 책을 필사했다. 내 안에서 내가 하는 말을 조금씩 듣게 되었고, 그걸 하나씩 실행해 나가는 재미에 빠져 버렸다. 일주일에 한 번 쓰기도 힘들었던 글을 하루에 몇 장씩 써보기도 하고, 절대 저 사람 책은 안 볼 거야 했던 책을 읽으며 새로운 재미를 찾기도 했다. '지친 몸을 추스르고, 일상의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거창한 쾌락이 아니라 사소한 즐거움'이라는 헤세의 말이 너무 와닿았다. 음주라는 쾌락을 버리고 책과 글,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준비를 하며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사소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들고, 바로 노트북을 여는 이런 여유. 소파로 가서 티브이 리모컨부터 잡던 나는 기억 저편으로 빠이빠이다. 이 단순한 패턴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부끄러움도 모른채 어설프기 그지 없는 글을 연재하며 '처음인데 뭐'라고 퉁쳐 버리는 용기까지도 생겼다. 새로운 시작 앞에 놓여 있던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그 두려움을 대체할 지식과 지혜를 쌓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삶은 후회하고, 딛고 일어서며,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과거에 연연하던 나는 이제 내일이 즐거운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내일이 즐겁기 위해서 나는 오늘 175일째 금주 일기를 쓴다. 아직 술과의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분이 있다면 그 시간을 대체할 거리를 찾아 두고 시작하길 권한다. 책이든, 운동이든, 멍하니 있다보면 다시 생각나는 게 그 술이란 놈이니까. 술 없이 무슨 재미로 살지? 아니,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 있다. 주당 열정 아줌마가 증명한다. TMI지만 술때문에 치질 수술 두 번이나 한 사람이다. 그만큼 술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이런 시간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일단 한 번 해보시라. 이제 금주 전도사가 될 지도 모른다. 주류회사에서 소송 들어오면 어쩌지? 예전엔 상 안준다고 툴툴거렸는데. 내일은 진짜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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