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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아줌마 Oct 23. 2024

팔찌

 반복되는 퇴근길 지옥철. 어제였나, 그제였나. 한 번쯤 본 적도 있는 듯 없는 듯한 얼굴들. 누군가에게 낯익은 또는 낯선 그 시간 어느 때쯤의 지나가는 인연. 다희는 꽉 찬 공간에서 용케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비집고 섰다. 이 좁은 지하철 안에도 내가 설 곳은 있는데 넓은 땅위에는 왜 내 자리가 없을까?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인턴 3개월 차. 이제 다음 달이면 새 직장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 자리도 너무 어렵게 얻었는데 다시 지긋지긋한 면접을 보러 다닐 생각을 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순간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가 밀려왔다. 필사적으로 인파를 뚫고 내렸다. 한참 숨을 고르고 보니 서울역이었다. 바깥 공기가 필요했다. 그녀는 서울역 광장 쪽으로 나와 계단 끝에 걸터앉았다. 저 많은 사람은 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그녀는 한동안 앉아서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과 시내버스 행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집에 가봐야 아무도 없다. 그러고 보니, 남자 친구도 요즘 통 소식이 없었다. 그냥 본가나 가버려? 아니다. 가봤자 엄마 잔소리만 듣게 될 텐데…. 게다가 내일은 인턴에서 정사원 여부가 결정되는 중요한 날이다. 마치 도망가려고 용을 쓰는 것 같다. 덤덤해질 때도 되었건만 해고라는 사실은 다희에게 두려움이자 공포였다. 심지어, 이 회사는 왜 인턴이 끝나는 시점 기준, 보름이나 먼저 정사원 결정 여부를 알려준다는 것일까? 어차피 안 될 놈들 보름도 아깝다는 것일까?

 

다희는 자신이 없었다. 인턴 세 사람 가운데 탈락하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 눈빛도 그런 것 같았다.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웠다. 여름밤은 쉬이 오지 않았고, 무기력이란 놈도 그녀의 발목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기 무섭게 노숙인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내일의 두려움보다 눈앞에 있는 낯선 이들이 당장은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절망스럽지만 일단은 집으로 가야 했다.

  

숨이 막혀 지하철에서 나온 지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무거운 발걸음. 아홉 시가 넘었으니 지하철 안도 조금은 여유가 있겠지. 오지도 않은 내일이 두려워 발을 떼는 속도는 자꾸만 느려졌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다희 눈에 조그만 노점상이 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 예쁜 액세서리가 묘하게 사람을 이끌었다. 반짝반짝 제각각 빛을 뿜고 있는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니 이런 예쁜 것들과 한참 거리를 두고 살았구나 싶었다. 참 좋아했는데…. 잠시만 봐야지 하다가 이내 팔찌 하나를 고르고는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어쩜 눈썰미도 좋네, 딱 하나밖에 없는 팔찌거든요.”

잠시 후 젊은 여자는 다희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이 팔찌가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예요.”

 다희는 상술인 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팔찌는 이내 팔에 걸고 삼만 원을 건넸다. 요즘 웬만하면 십만 원은 그냥 넘어가는데 이 정도 품질에 삼만 원이면 공짜나 다름없었다. 다희는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다가 언니 생각이 나서 다시 노점상을 찾았다. 그새 철수했는지 자리는 비어 있었다. ‘빨리도 갔네. 내가 마지막이었나. 다른 거라도 더 살걸.’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회사는 여느 아침과 다를 게 없었다. 오늘 퇴근쯤이면 알게 될 터였다. 다음 달부터 여기 정식 사원이 될지, 짐을 싸야 할지. 자세히 보니 다른 인턴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희는 그냥 운에 맡기기로 했다. 벌벌 떤다고 달라질 일도 아니다. 그보다 오늘은 출근 전에 신경 써서 화장도 하고 옷도 골라 입었더니 보는 사람마다 데이트라도 가냐고 묻는다. 입꼬리가 제 맘대로 씰룩거렸다. 사실 팔찌의 반짝거림에 맞추다 보니 화사하게 입긴 했다. 다시 봐도 고급스럽게 잘 만든 팔찌다. 오늘도 있을까? 퇴근길에 들려서 다른 것도 좀 사야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더 좋아졌다.

 

즐겁게 하루를 시작했다. 설마 아침부터 ‘다음 달부터 안 나와도 돼!’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그 생각이 들키기라도 했는지 김 부장이 어제 맡긴 자료를 긴급히 가져오란다. 저승사자 같으니라고. 이미 다 해 놓은 거라 가지런히 정리해서 웃으며 건넸다. 웬일로 관음보살 같은 온화한 미소로 반겨 준다.

“다희 씨, 오늘 좋은 일 있어?”

“아니요. 오늘 안 좋은 일 있어요.”

“아니, 왜?”

“저 오늘 인턴 끝나잖아요. 가급적 퇴근 시간에 알려주세요. 그래야 하루라도 버티죠. 아, 미리 인사라도 드려야 하나요?”

“아, 그거 월말까지 보류됐어. 안 그래도 공지하려던 참이었는데, 두 사람한테도 알려 줘. 중간에 알리는 건 아니라는 임원진들 결정이야. 월말까진 걱정 안 해도 돼.”

“진짜요?

“그렇게 좋아? 하하하, 보름 동안 더 열심히 해 봐.”

“네! 부장님!”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동안 상사들에게 다희는 수없이 지적받았고 지효 씨랑 근호 씨는 칭찬 일색이었다. 당연히 본인이 오늘 떨어졌다는 통보를 받을 거라고 장담했는데 보름이란 시간이 더 주어졌다. 물론, 보름 뒤에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그래도, 기대가 생겼다. 두 달여 다녀 본 이 회사는 다희가 바라던 곳이었다. 복지도 좋고, 급여도 다른 곳보다 조금 더 높았다. 무엇보다 기회가 많이 주어졌다. 디자인 쪽으로 자신있는 다희였지만 남 앞에 서거나 주목받는 일에 서툰 그녀로서는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늘 뒤에서 속앓이만 해야 했다. 하지만, 이곳은 열려 있는 회사였다. 전에 없던 욕심이 났다.

‘어차피 보름이야. 지금 잘리나 나중에 잘리나 다를 건 없어. 이왕 버티는 거 그동안 못한 거나 실컷 해보자. 나가면 그만인데 뭐. 보름만 쪽 팔면 돼.’

 그녀는 숨겨 둔 자신의 디자인을 언제든 내보일 수 있게 손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더 친근하게 어울렸다. 보름이 지나면 못 볼 사람들. 있는 동안 친하게 지내다 보면 나에게 다른 곳을 소개해 줄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계산도 깔려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도 인연인데 소중하게 여겨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즐겁고 행복했다.

“아니, 다희 씨, 이렇게 재밌는 사람이었어. 그동안 내숭이었던 거야?”

“아뇨, 보름 후에 잘리니까. 그동안이라도 행복하고 싶어서요. 저 극 I에 대문자 A거든요. 다음 달에 못 보니까 상처 안 받게 잘 대해주세요.”

주변 사람들이 다 웃는다.

“보름이라도 행복 하자? 노선을 갈아탔나 보네. 그러다가 보름 후에 그만두면 속상해서 어쩌려고.”

“며칠 아프긴 하겠지만, 몇 번 잘려 봐서 단련은 돼 있어요. 그런데, 또 모르잖아요. 어디서 어떻게 만나게 될지. 주변에 아시는 데 있으면 좀 꽂아 주시고요.”

“다희 씨~ 능청 보소, 사람이 180도 바뀌었네. 진작 이러지. 얼마나 좋아. 우리는 다희 씨 우울증 있는지 알았잖아.”

“오늘 짐 쌀 각오까지 하고 왔거든요. 근데, 보름의 시간이 더 있다고 하니까 갑자기 신이 나네요.”


 그러나, 아무도 다희에게 정사원 될 테니 걱정 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아무렴 어때, 내가 보름을 즐겨 보겠다는데,’잘릴 때 잘리더라도 추천서 하나라도 받아보자는 마음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지효 씨와 근호 씨는 초반부터 열심히 했으니 지금 따라가도 거북이와 토끼 싸움일 터. 이솝우화에서나 거북이가 이기지, 현실은 토끼가 이긴다. 뭐, 괜찮다. 어차피 나는 잘릴 것이다. 그래도 회사 임원이란 사람들이 염치는 있나 보다. 남은 보름 열심히 일하다가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나쁘지 않은 마지막이다.

다희는 퇴근길에 일부러 서울역에서 내렸다. 어제 그 노점상을 찾아봤지만 아무 데도 없었다. 다른 노점상들은 몇 군데 있었는데 대형 쇼핑몰 매대거나 종류가 달랐다. 정해진 시간이 있나 싶어서 기다려보았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직장인으로서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주말이 다가왔다. 일요일 오전, 다희는 남자 친구의 메시지를 받고 집 앞 카페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오래된 연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늘어진 바지에 모자 정도였을 테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곱게 화장도 하고 꽃무늬 원피스도 입었다. 석호는 다희를 보자마자 눈이 똥그래졌다.

“야, 강다희, 너 오늘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너 이렇게 나온 거 너무 오랜만이라서.”

“내가?”

“응, 너 매일 집에서 입던 그대로 나왔잖아.”

“내가 그랬나? 근데 왜 불렀어? 우리 안 본 지 2주 넘었더라.”

“그렇지…. 내가 널 왜 불렀냐면 그게……. 아니다. 너 모처럼 차려입었는데 한강공원 갔다가 영화나 보러 갈까?”

“그러자. 안 그래도 바람 좀 쐬고 싶었어.”

 다희는 한강공원으로 가는 내내 석호에게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며, 어제 본 드라마까지 한없이 재잘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같이 인턴 중인 지효라는 친구가 상사들 앞에서 간드러지게 대답하는 게 꼴 보기 싫다며 그전에는 없던 뒷담화도 했다. 석호는 신기해서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희는 그렇게 밝은 아이였다. 다희의 언니가 대기업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의 엄마는 매일 언니와 다희를 심하게 비교했고 견디다 못해 집 나와 혼자 산 지도 벌써 3년째에 접어들었다. 다희의 밝음과 자존감과 자신감은 육체적 독립과 동시에 모두 그녀에게서 빠져나갔고, 무채색 아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석호는 사진 찍는 걸 좋아했다. 처음 사귈 때는 커플 사진도 많이 찍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희가 부담스럽다며 거절했다. 흔한 연인들의 네 컷 사진도 없다. 오랜만에 기분 좋은 다희에게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분위기만 나빠지는 거 아닌가 싶어 눈치만 살폈다. 오늘 그녀의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

“석호야, 나 사진 한 장만. 여기 너무 이쁜데?”

“어? 어! 알았어. 지금 그대로 좋아. 찍을게.”

 석호는 신이 나서 다희의 사진을 찍었다. 이쁜 친구다. 뽀얀 얼굴이 오늘은 더 화사해 보인다. 늘 검은색 옷만 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다녀서 큰 눈과 동그란 얼굴이 다 가려졌었는데 밝은 미소와 더불어 그녀의 얼굴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석호는 오늘 그녀에게 하려던 이야기를 조금 더 미루기로 했다.

 다희는 석호와의 데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옷장 속에 있던 검은색 계열의 옷을 다 골라냈다. 이건 좀 아까운데 싶은 몇 개는 다시 옷장으로 밀어 넣고, 즐겨 입던 헤진 티셔츠며 바지들을 과감하게 버렸다. 그리고, 퇴근길에 눈으로만 스치던 가게에 가서 원피스와 과감한 색깔의 옷을 몇 벌 구매했다. 그리고, 화장품도 몇 개 사서 돌아왔다.


 월요일이다. 인턴 생활 마지막 주가 시작되었다. 시간 더럽게 잘 간다 싶다. 이번 주만 끝나면 이 회사도 안녕.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동안은 어느 회사를 가도 ‘어차피 오래 못 다닐 건데 대충 하자.’ 는 생각으로 살았다. 그렇게 잘리고, 칩거 생활 동안 주변인들과 모든 연락을 끊고, 다시 기어 나와서 면접을 두세 군데 보고 또 짧게 회사 생활을 하다가 권고사직 당하기가 일쑤인 그런 삶이었다. 아직 서른 전인데도 그녀의 인생은 막을 내린 무대처럼 황량했고, 자기 불신이란 몹쓸 녀석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다희는 이 회사가 너무 좋았다. 감히 넘볼 수 있는 데가 아니었다. 인턴 자격이라도 어디냐. 감지덕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떠나게 될 테니 정붙이지 말자. 그래서, 늘 맡은 일만, 주어진 일만 소극적으로 해 왔다. 그런데, 지난주 어느 아침, 팔찌에 맞는 옷을 고르며 생각했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 게다가 기적처럼 보름의 시간이 더 주어졌다. 전에 없던 자신감이 솟아 올랐다. 석호와도 한동안 어색했는데 어제 첫 데이트를 하는 것처럼 설레었다. 내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 오늘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출근 전, 그녀는 어제 새로 산 옷을 입고 새로 산 립밤으로 입술과 볼에도 생기를 주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이곳에서의 일주일을 재미나게 보내보자.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부장실에 들어간 지효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 다음 달 정식 발령이 나면 어떻게 하라는 얘기를 몰래 나누고 있나 보다. 다희는 그런가보다, 하면서 오후에 제출할 보고서를 마무리하며 기다렸다. 잠시 후 부장실 방문이 열리며 그녀가 나왔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다희의 자리로 와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나가자는 손짓을 하며 앞장섰다. 점심을 같이 하기로 약속했었다. 경쟁자이기 전에 동갑인 직장에서 만난 친구이기도 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응, 혼났어. 보고서 잘 못 써서.”

“너도 혼날 때가 있어? 나는 매번 혼나서, 혼나도 뭐.”

“나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아무래도.”

 다희는 잘 못 들었나 싶었다.

“무슨 소리야, 네가 안 되면 누가 되냐? 걱정 하지 마. 떨어지는 건 내가 해줄 테니까. 뭐 먹을까? 나 오늘 하얀 옷이야 색깔 없는 거 어때?”

지효는 다희의 말에 피식 웃고 만다.

“색깔 없는 거라 그게 더 어렵다. 음…. 평양냉면?”


 둘은 근처 맛집으로 유명한 평양냉면집에 앉았다. 음식이 나올 동안 지효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생소한 말을 꺼냈다.

“나는 이번 회사가 다섯 번째야. 두 달을 못 넘겼어. 힘든데 안 힘든 척 웃고, 선배들 비위 맞추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 누가 나를 지적하거나 판단하는 것도 싫어. 그들의 눈높이에 나를 올려두는 것도 버겁고…. 그런 생각을 하면 미칠 거 같아.”

늘 밝고 싹싹하던 지효가 그런 말을 하니까 이질감이 들었다.

“나는 네가 회사 생활에 최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내 자리만 있으면 견딜 수 있거든. 내 판단으로 다녀 본 적이 없어서, 늘 잘렸으니까. 이번에도 물론 그럴 테지만.”

마침 기다리던 냉면이 나왔다. 하얀색 원피스에도 무리가 없는 맑고 투명한 국물이다. 아침까지도 투명해 보이던 지효가 순간 불투명해 보였다. 다희는 그녀의 어떤 면을 보고 사회생활의 적임자라고 판단했던 것일까? 다희도 눈치 보는 건 마찬가지다. 그녀의 눈치와 다희의 눈치가 뭐가 다른지 의문스러웠다.


사무실에 돌아오자, 근호 씨가 입사 1년 차 선배에게 호되게 당하고 있는 게 보였다. ‘오늘 인턴들 돌아가며 혼나는 날인가? 그럼, 이제 곧 내 차례겠군.’ 다희는 오후에 제출할 보고서를 훑고 또 훑었다. 오자 하나도 용서치 않겠다는 생각으로 집중해서 보고 또 보았다. 잠시 후,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부장실 문을 노크했다.

“보고서야? 이리 줘 봐.”

다희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오늘의 대미는 내가 장식하겠지. 그래야, 인턴 조짐의 날은 성황리에 마무리될 것이다. 혼나는 건 이력이 난 다희였다. 눈을 질끈 감고 ‘어서 처분을 내려 주세요.’라는 마음으로 덤덤히 기다렸다.

“나가 봐.”

“네?”

“나가서 일 보라고.”

다희는 더 있다간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아 잽싸게 나왔다. 혼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저도 모르게 휘파람이 나오려던 찰나 핸드폰에 메시지 알람이 떴다.

‘오늘 저녁에 술 한잔하자. 건대 입구, 우리 첫 데이트 했던 데.’

‘오~ 거기. 안 간지 엄청 오래됐네. 그러자. 마치면 바로 갈게.’


 다희는 퇴근 시간이 기다려졌다. 석호와 대학교에서 만나 사귄 지 벌써 5년이 지났다. 석호는 군대를 막 다녀온 복학생이었고, 다희는 대학 졸업반이었다. 옛날 생각을 하면서 조그마한 골뱅이 집으로 들어갔다. 회사가 근처인 석호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미리 시켜뒀어. 괜찮지?”

“그럼, 괜찮지~ 여기는 변함이 없어서 좋아. 어쩜 그대로네.”

다희는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돌아보았다. 석호는 다희의 얼굴과 옷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예전에는 즐겨 입던 스타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검은색 옷만 고집하기 시작해서 모자로 얼굴마저 가려야 집 밖을 나서던 다희였다. 출근할 때도 늘 검은색 계열의 옷만 입고 다녔다. 화장도 하지 않아 그야말로 우중충했다. 색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어제 석호는 달라진 다희를 보았다. 그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모습, 한 번 더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월요일인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술 마시자고 제안했다. 검은색 다희였다면 월요일부터 무슨 술이냐며 거절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 하얀색 원피스를 팔랑거리며 볼과 입술엔 적당한 핑크빛으로 채색된 그녀가 앉아 있다. 마치 처음 본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지효가 회사가 힘들대.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게. 너도 그런 생각할 때 있어?”

“당연하지. 수도 없이 많았어. 실제로 내 동기 중에 한 녀석은 관두고 얼마 전에 커피전문점 열었어. 돈이 마르지 않는 샘물이라도 있으면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나는 누가 나를 인정해 준다면 힘들어도 괜찮을 거 같아. 한 번도 그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석호는 그녀에게 다시 검은 아이가 다가올까 봐 화제를 돌렸다.

“이거 다 마시고, 좀 걸을까?”

“아니야, 그냥 여기서 더 마시면서 너랑 얘기하고 싶어. 대신에 나 집에 데려다주라. 안 될까?”

“안되긴, 아예 너희 집에서 2차를 할까보다.”

“그건 아니 되거든요. 어디 또 음흉하게.”

 

 석호는 오랜만에 다희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게 얼마 만인지. 석호는 다희와 택시에 나란히 앉아 자기 어깨에 기대 잠든 다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렇게 웃으며 즐겁게 보낸 게 거의 3년 만의 일이다. 그녀가 최근에 갑자기 예전 모습을 찾은 게 신기하기만 했다. 다희가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석호는 점점 그녀가 버거워졌다. 그래서, 그만하고 싶었다. 같이 있으면 그도 다희의 검은 색에 물드는 것 같았다. 질려버렸다. 그래서, 그녀에게 그만 만나자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제, 오늘의 그녀는 그가 반했던 5년 전 다희였다. 매번 힘들다는 말만 하더니 어찌 된 일인지 며칠 남지도 않은 회사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헤어질 결심을 했던 석호는 오히려 그녀에게 다시 반해 버리고 말았다.      


다희는 화장대 옆에 붙은 조그만 보드에 숫자를 고쳐 적었다. 이제 3일 남았다. 이 회사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수요일. 아직 잘리지 않았다. 그럼 된 거다. 다희는 오늘 초록색 니트셔츠를 입고 하얀색 치마로 멋을 냈다. 너무 과감한가 싶었지만, 거울로 보니 괜찮았다. 오랜만에 하이힐도 신었다. 팔찌에 어울리게 입으려면 이 정도의 옷은 입어줘야 할 것 같았다. 다희는 긴 줄 끝에 제때 맞춰 도착한 지하철 안 사람들 숲에서 고요를 느꼈다. 그렇게 싫었던 출근길이 요 며칠은 기다려졌다. ‘어, 저 사람은 어제도 저역에서 타더니. 오늘도 타네. 네 정거장 뒤에 내리겠지.’ 어느새 낯익어 버린 그들을 하나, 둘 보내며 자기처럼 치열하게 하루를 살겠구나 싶어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회사 로비에서 근호 씨를 만났다. 얼굴이 퉁퉁 부었다. 어젯밤 라면이라도 먹고 잔 건가,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혀끝까지 궁금증이 밀려왔지만, 참았다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마주친 선배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한마디씩 했다.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전역한 친구와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나. 아하, 그렇구나.


사무실에 올라가자, 1년 차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 세 인턴사원을 부르더니 부장실로 밀어 넣었다.

 “거기 셋, 다 앉아.”

 자리에 나란히 앉자, 김 부장은 조용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번 주가 자네들 인턴 마지막 주야. 알고는 있지?”

“네.” 셋은 동시에 대답했다.

“이제 오늘 포함해서 3일 남았네.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봐. 알았지?”

혼나는 일이라도 있을까 봐 걱정했다. 출근하자마자 불러 모으니까. 3일 남은 건 다희도 알고 있다. 오늘 아침에 직접 체크까지 했다. 굳이 확인 사살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잔인한 김 부장. 다희는 선배들의 일거리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아서 묵묵히 일했다. 옆자리 지효는 계속 왔다 갔다 했다. 어제 점심때 그녀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냥 김 부장에게 혼나서 한 말이겠지. 그러고 말았다. 화장실도 참아가며 일했더니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선배에게 받은 일을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건네주고 화장실부터 찾았다. 손 씻고 휴지 한 장 감아서 닦고 나오려는데 화장실 안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발소리도 못 내고 그 자리에서 가만히 엿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참 울던 그녀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엄마, 나 회사 생활 너무 힘들어. 나 도는 거 보고 싶어? 미쳐 버리겠다고!”

 다희는 여기까지만 듣고 자리로 돌아왔다. 지효였다. 사회생활의 달인으로 보였던 그녀가 아닌가? 내성적인 다희는 그녀의 싹싹함과 처세술이 샘이 났었다. 어제 그녀의 말은 흔한 직장인의 푸념이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선배들에게 이쁨도 독차지하고 있고, 부장도 직원들 앞에서 지효를 칭찬하는데 하늘도 참, 그런 능력은 나한테나 주시지. 불공평한 세상 같으니라고. 동시에 나쁜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힘들면 정사원 발표 전에 그만두면 안 되나? 그럼 혹시 어부지리로 내가 될 수도 있을 텐데. 다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쁜 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눈이 벌건 채로 자리에 앉는 그녀를 보니 괜히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아는체할 수도 없었다. 화장실에서 울더라, 본의 아니게 들어 버렸다. 그럴 수는 없지 않나. 어영부영하다 보니 퇴근 시간이 되었다. 석호도 오늘은 바쁘다고 했으니, 집에 가서 볼 드라마 제목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데 옆에서 책상을 톡톡 두드린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시간은 늘 많아. 왜?”

“나랑 한 잔 어때?”

 다희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둘은 퇴근 시간에 맞춰 나란히 회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근처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일 마치고 술 마시러 다니는 유튜브 방송이 있거든. 나도 한번 해보고 싶었어.”


그냥 가서 마시면 될 일이지. 앞으로 날들이 얼마나 많은데, 정작 다희가 해야 할 버킷리스트일지도 모르는데 싶어 살짝 재수가 없었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울던 그녀가 생각나서 잡다한 생각들은 이내 지워 버렸다.

“앞으로도 날이 많잖아. 아무 때나 오면 되지.” 그사이 주문한 하이볼이 먼저 나왔다. 둘 다 목이 탔는지 자동으로 손이 하이볼 잔으로 향했다. ‘회사 생활 잘만 하면서 왜 힘들어 미치겠다는 거지.’ 다희는 엿들었던 내용이 생각났다. 그녀는 단숨에 한 잔을 비우고는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너 술 센가보다. 무슨 하이볼을 맹물 마시듯이 마시냐?”

“오늘이 마지막이거든. 회사 생활하면서 술 마시는 거. 직장인으로서 이런 술집에 올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라~ 이 말이지.”

“무슨 소리야? 아직 발표도 안 났어.”

“그런 문제가 아니야, 나는 회사 생활이 싫어.”

“회사가 싫다면서 면접은 왜 본 거야?”

“엄마 때문에. 나는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일하는 게 체질에 안 맞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사는 것 같은 기분이야.”

누구보다 사회성 좋아 보이던 그녀가 내뱉는 말들은 다희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나 같은 사람도 버티고 있는데?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있잖아. 자그마한 공방을 하고 싶었어. 소품도 직접 만들어서 팔고,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 소수로 가르쳐 주면서. 나만의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싶었어. 물론, 결혼 생각도 없고. 그런데 절대 그렇게 살아선 안 된대. 우리 엄마가. 시집은 꼭 가야 하고, 그러려면 번듯한 직장이 있어야 한대.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녀는 두 번째 하이볼도 이내 비웠다. 다희는 그녀의 속도를 맞추기가 힘들었다. 그냥 조용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페이스를 조절했다.

“우리 언니가 회사에서 형부를 만났거든. 누구나 다 아는 큰 회사고, 애 키우느라 지금 휴직상태긴 하지만, 엄마는 언니가 거기서 일했기에 지금 형부라도 만났다고 생각해. 더 좋은 사위 못 본 걸 아쉬워 하면서. 그걸 나한테 기대한다고, 매일 중매 자리나 기웃거리면서! 우리 아버지가 돈 버는 데는 재주가 없었거든. 엄마 고생한 건 알지. 근데, 그게 내가 회사 다니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지효는 이미 취한 것 같았다. 어느 틈에 그녀는 하이볼에서 소주로 갈아타 있었다. 더 마시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녀를 억지로 데리고 나와 근처 공원 의자에 가서 앉았다. 집도 모르는 데다 취했는데 택시를 태울 수도 없고, 술이 좀 깰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혼자 계속 주절거렸다. 다희는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곧 잘릴 테지만, 남은 3일이라도 잘 보내자며 마음 고쳐먹고 있는데 이 친구는 처음부터 그만둘 생각만 하고 있었다니. 약이 오르기도 했다. 엄마 생각도 났다. 우리 엄마는 결혼하라고 재촉하지 않아서인가? 다희는 그녀와 자기가 뭐가 다른지 아리송해지기 시작했다. 두 시간 정도 지나자, 지효는 술이 좀 깬 듯했다. 택시를 잡아서 번호까지 기억한 뒤 잘 가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그녀는 출근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D-DAY가 되었다. 김 부장은 다희를 자기 방으로 불렀다. 너무나 어이없게도 다희만 정직원이 되었다.

“처음부터 강다희 씨를 생각하고 있었어. 근데, 하나가 마음에 걸렸었거든.”

다희는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김 부장을 바라보았다.

“너무 어두워서, 표정도 밝지 않고. 다른 회사에서는 그런 말 못 들었어?”

“네, 한 번도.”

“생각도 창의적이고 일도 잘하는데 주변 사람들하고 어울릴 수 있을까 그게 제일 걱정이 되더라고. 능력도 필요하지만, 인간관계도 중요하니까 조직 생활은. 그런데, 웬걸. 요즘 보니까 괜한 걱정이었어. 다희 씨가 긴장해서 그랬나 봐. 앞으로 잘 부탁해.”


 그녀는 부장실에서 나와서 책상에 앉았다. 이제 이 자리에서 짐을 치우지 않아도 된다. 어리둥절했다. 근호 씨는 탈락을 알고 이미 짐을 싸서 나가 버렸다. 퇴근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희는 곧장 석호에게 사실을 알렸다. 축하 파티 하자며 호들갑이다. 직접 준비도 하겠다나? 다희도 사실 마음속에선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집으로 가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곰곰이 생각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인생의 낙오자였다. 언니와 비교하며 나는 어차피 안돼 라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미래도 없었고, 석호도 곧 자기를 떠날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웬걸?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미래가 생겼고 석호는 아직 다희 옆에 있다. 그녀는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내 방송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서울역> 다희는 서울역에서 내려 그 노점상을 찾았다. 하지만, 그 젊은 여자와 좌판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녀의 귓속말이 다희의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이 팔찌가 당신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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