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커플은 글쎄요..

아이 생일날 꺼내보는 결혼 스토리~

by 열정아줌마

2006년 1월 17일.


내가 세상에서 제일 먼저 내 모든 걸 다 줄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한 소중한 사람을 만났다. 3킬로도 안 되는 작은 몸에 뽀얀 피부.. 갓 태어난 아기가 이렇게 이쁠 수 있냐고 간호사들마저 입을 댄.. 물론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은 우리 큰 딸아이의 생일이다. 우리 집은 생일이면 생일 케이크만큼은 본인이 먹고 싶은 디자인과 종류를 고르는 전통(?)이 있다. 아이와 함께 생일 케이크를 사러 가는데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16년 전 오늘이 기억나요?"

"당연하지, 그날 날씨랑 바람 냄새랑 주변 풍경까지 다 생각난다~"

"아... 그렇구나.."


기분 좋은 눈치다. 자기가 태어날 날을 하나하나 다 기억을 하고 있다 하니 새삼 엄마가 자기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느껴져서일까. 좋아하는 케이크를 고르는데 신이 났다. 아이는 케이크를 고르고, 나는 그동안 살아온 시간이 한 컷 한 컷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랬는데.. 맞아.. 혼잣말로 되내니 아이가 예? 하고 되묻는다. 아니야.. 아무것도...


우리 부부는 회사에서 만났다. 처음 보자마자 결혼할 여자라는 느낌이 왔다며 첫 만남에서 얘기할 때 거절했어야 했는데.. 내 발등 내가 찍었지 뭐... 이렇게 얘기하니 내가 결혼을 엄청 후회하는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기혼자의 절반 이상이 현재 배우자를 만난 걸 후회한다고 하니 나한테만 국한된 얘기는 아닌가 보다. 18년 동안 그런 위기 상황은 지금 대선 후보들의 기싸움 저리 가라 일정도로 무수히 많았고, 실제로 이혼도장 찍기 일보직전까지도 갔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아주 만족하고 있고, 부부보단 전우애로 매일매일 치열하게 살아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환갑에 졸혼을 꿈꾸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남편은 아직 동의하지 않았지만.. 꿈이니까 뭐.. 실제론 평생 등 맞대고 살겠지.. 졸혼은 나만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남편은 일본 생활 10년을 접고 막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시작한 나이 많은 한국사회생활 초년생이었고, 나는 28살에 새로운 직장을 찾다가 결혼은 언제 할 거냐는 면접 질문에 할 생각이 없다고 대답하고 합격한 경력직 여. 직. 원이었다. 물론 경력직의 대우를 받은 건 아니니 그도 나도 햇병아리 입사 동기라고 봐야겠다.


여느 직원들과 조금 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본어를 구사하면 그냥 일본 사람.. 소위 말해 쪽발이 그 자체였다. 머리에 뽀마드 기름을 바른 것 마냥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빗어 넘긴 머리며 일본스러운 양복에 몸에 밴 일본식 친절함. 내가 일본어 전공자여서 유독 그런 면이 두드러져 보였던 건지도 모른다.


외모만 독특했다면 또 그러려니 하겠지만, 성격 또한 평범하지가 않았다. 굉장히 자유로웠고 이기적이었으며 지나치게 친절했다. 下心 [したごころ, 시타 고코로]라고 해서 겉모습과 속마음이 다르다는 일본인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 있는데 딱 그 말에 들어맞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그런 그를 오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겉으로는 아주 친절한데 또 이기적이다. 근데 일본인과 다른 점은 그걸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많이 사기도 했다. 그렇다고 본인이 그걸 해명하지도 않으니 오해는 더 커지기 마련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보통 사람들과는 아주 많이 다른, 호불호가 있는 사람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밤마다 모르는 번호로 같은 시간에 문자가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반복이 되니 누군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하는 회사라 새로 입사한 남자 직원들이 스무 명 가까이 되었는데 그중 하나임엔 분명했다. 며칠 반복적으로 문자를 받다가 그 번호가 누군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일주일쯤 지나서였나보다. 설마설마했는데 그 사람이었다. 쪽발이..


뭐지? 이 사람이 나한테 관심이 있다고?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끈질기게 만남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심히 툭.. 문자 하나가 끝이다. 거기다 대고 나 당신 싫어요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누가 봐도 회사생활에 대한 자문과 선배들과의 고충에 대한 이야기인데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과하다 싶었다. 그게 작전이었는데, 나는 전혀 캐치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주 문자를 보내더니 어느 날 밤 갑자기 전화를 한다. 처음부터 일본어로.. 그렇게 매일 밤 일본어 통화는 이어졌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지.. 그렇게 나도 모르게 그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던 거 같다. 자기를 낯설지 않게 하는 작전.... 나는 그 덫에 빠져버린 거다. 그렇게 아주 당연히 걱정해주고 이해해주는 사이로 발전하다가 어느 순간 연인이 되어버렸다. 순식간에 내 인생이 결정돼버린 거다.


지금 와서야 얘기하지만, 사내커플로 10개월 정도 데이트하다가 결혼했는데 그 심장 터질듯한 경험은 글쎄... 나처럼 간이 적은 사람들은 힘들지 않을까? 얘깃거리도 많고, 많은 시간을 공유하기에 사내커플의 장점은 분명 많지만, 우리 회사처럼 사내연애가 비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분위기에서 몰래 만나는 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연예인들의 비공개 연애와 비슷하려나.. 하긴, 요즘 세대들은 그런 부분도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아서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판교에 있는 여러 회사들의 베네핏에 대해 방송을 한 적이 있다. ㄴㅅ이라는 회사에 다니는 분이 패널로 나와서 이야기를 했는데 그 회사는 많은 분들이 사내커플인 듯했다. 출연하신 분도 사내커플이었고..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세상 많이 변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람이 없어서 계속 일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사내에서 연애하다가 결혼하면 여직원 쪽이 그만두는 분위기가 많았던 라떼와 비교하니 말이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조금 아니 많이 고민해보게 될 것 같다. 아니다, 결혼 자체를 안 할지도.. 다시 태어나면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매일 하고 있으니 평생 독신으로 살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결혼을 안 하겠다고 면접 통과해놓고, 그것도 입사 10개월 만에 혼전임신으로 결혼하겠다 하니.. 사장님의 그때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사장님, 그 부분은 죄송합니다. 그래도 출산휴가 한 달도 못쓰고 다시 복직해서 일했으니 저도 할 도리는 다했죠?)


아주 더웠던 7월 말의 어느 날, 우리는 평생을 약속하는 부부가 되었고, 그 이듬해 1월에 우리 복덩이(이 아이 덕분에 결혼했다고 해서 태명이 복덩이다)가 태어났다. 지금도 니 덕분에(?) 우리가 결혼했다고 생일이 되면 큰딸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우스갯소리로 내가 니때메 이렇게 산다고 장난도 친다. 어찌 됐든 우리 부부는 아빠를 쏙 빼닮은 아이 셋과 신나게 살고 있는 중이다. 우리 부부에게 와준 거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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