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혼잣말

아빠카드로 플렉스

아빠카드로 좁혀진 부녀 사이

by 열정아줌마

"큰 딸! 내일 머 해?"

"암 것도 안 하는데?"

"엄마, 건강 검진하는데 좀 올래?"

"아부지 있잖아?"

"산에 간단다. 문디나그네. 이럴 때 같이 가 주면 좀 좋나."

"그래. 일찍 갈게요."

나름 바쁘지만 엄마한테 바쁜 티 내는 것도 우스워서 기쁜 마음으로 가기로 했다. 건강 관리를 늘 잘하는 분이라 걱정될 것도 없고 끝나고 점심이나 먹고 오자 싶어 다음 날 아침 서둘러서 갔다. 차로 가면 30분 거리지만 버스를 타면 한 시간 10분이나 걸린다. 그래도 한 방에 가는 버스가 집 앞에 오는 관계로 그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어디 가나 주차가 제일 문제다. 애매할 때는 차는 버리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오전 9시부터 검진이라길래 10시쯤 가면 어느 정도 끝나있겠지 싶어 느긋하게 갔다. 그럼에도 9시 반에 도착한 나라는 인간. 좀 기다려야겠군. 터벅터벅 병원으로 올라갔는데 아니 왜? 아버지가 거기서 나와?

"아빠, 왜 여깄어요?"

"엄마 건강검진 하는데 따라와야지."

"아니이~~ 엄마가 아빠 산에 간댔단 말이야."

"산에는 내일 가면 되지. 엄마 들어간 지 30분 됐다."

"알아요. 아빠 산에 다녀오셔. 내가 있을게."

"됐다. 엄마가 니 보고 싶어서 거짓말했는가베. 산에 안 간다고 했는데."

순식간에 거짓말쟁이가 되어 검사베드에 누워있을 엄마가 살짝, 아주 살짝 얄미워졌다. 그렇게 아빠와 나는 세상 어색하게 대기자 의자에 앉았다. 가만히 보고 있던 간호사가 우리 모습이 영 병원 분위기에 안 어울렸던지,

"어머니 추가 검사가 많으셔서 이제 초음파 받고 계세요. 초음파도 세 군데 보실 거고 위대장 내시경까지 다 하면 11시 반은 돼야 끝나지 않을까 싶은데 잠시 어디 다녀오셔도 됩니다."

이건 나가라는 건데, 답답하기도 하던 차여서 일단 아빠와 밖으로 나왔다. 병원 1층에 뚜레쥬르가 있었다.

'아빠는 집에 보내고 여기서 기다릴까?' 생각하던 차에 아빠가 먼저 선수를 치셨다.

"여기 들어가자, 커피 한 잔씩 마시고 있으면 되겠네. 빵도 파네. 아침 안 먹었제. 드가자."

"네, 아부지."

아빠랑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단 둘이 커피를 마셔 본 적은 없다. 단 한 번도. 가족 모두가 유명한 카페를 찾아가거나 여행 가서 마신 적은 있어도 이렇게 목적 없이 둘이서만 덩그러니 아무도 없는 오전 10시에 동네 빵집에 마주 보고 앉아서 무슨 이야길 하지? 혼자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데, 불쑥 핑크색 카드 한 장이 내 손에 쥐어졌다.

"아나, 니 먹고 싶은 빵 사고 커피, 나는 라떼. 나는 빵 안 먹어, 아침 먹고 왔다."

"제가 사요. 넣어두세요."

"내 지난주에 거제도 가서 돈 많이 벌어왔다. 이걸로 해라."

가끔 친구분이랑 조선소에 가서 일을 하고 오시곤 한다. 힘든 일은 아니라고 하니 말리지는 않지만, 나이 든 노인이 벌어온 돈을 백수 딸내미가 써도 되나 하는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한사코 거절했다.

"네가 갖고 있다가 엄마 나중에 병원비도 계산하고, 추가로 뭐 많이 해서 비용이 꽤 나올 거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겠다 싶어 나에게도 찾아온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르는 아빠 카드 찬스를 한 번 써보자 싶었다. 내 사랑 스콘부터 하나 집고 둘러보았지만 더 이상 쟁반에 담지는 못했다. 주문한 라테와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 테이블로 갔더니 꼴랑 이거 갖고 되냐고 더 사 와서 먹으라고 채근하신다. 아빠 드시고 싶은 거 있음 사온대도 당신은 지금은 먹음 점심 못 먹는다며 거절하신다. 그럼 됐다며 자리에 앉는 수밖에.

세상 어색하다. 나는 엄마랑도 닮았지만 아빠랑도 닮았다. 그래서 누가 봐도 부녀 사이인 걸 모를 수가 없다. 곧 팔십 인 아빠와 곧 오십 인 딸이 아침 10시에 동네 빵집에서 모닝커피라. 기억은 제대로 안 나지만, 큰 아이 대학 생활과 요즘 우리 애들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 더 젊어진 듯한 아버지 외모의 비결이 뭐냐고 묻는 등의 소소한 대화가 오고 갔다. 삼심 분쯤 흘렀을까? 그래도 10시 반이다.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지겨우셨는지 아빠는 집에 가서 기다릴 테니까 엄마 마취 풀리면 전화하라고 일어나셨다. 어느새 대단지 아파트에 익숙해져서 정문 엘리베이터를 향해 서슴없이 걸어가는 아빠 뒷모습을 보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나는 만끽했고, 어제 읽다가 만 책 한 권을 끝냈다. 마지막 장 스크롤을 넘기는데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시간을 보니 11시 20분이다.

"엄마, 아직이가?"

"네, 연락 없어서 슬슬 올라가 볼라고."

"나도 내려갈게."

병원에 가 보니 이제 내시경 시작했단다. 뭐가 이렇게 느린겨. 또다시 아빠와의 어색한 시간이 돌아왔다. 그렇게 한 시간을 더 기다렸나 보다. 내시경도 끝났고, 마취만 풀리면 되는 상황인데 엄마는 깨지 않았다. 그때부터 아빠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고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데? 이렇게 오래 안 깬다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회복실로 갔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엄마를 보자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작은 병원에서 소소하게 일어나는 마취사고. 온갖 나쁜 생각이 수 초안에 머릿속을 지나쳐갔다. 그때 코 고는 소리가 천장까지 치고 갈 기세로 울려 퍼졌다.

"아빠, 엄마 잔다. 코 골고 잔다. 완전."

그제야 아빠도 마음이 좀 놓였는지 의자에 앉으셨다. 간호사가 시계를 보더니 2시까지 아마 안 깨실 거라고, 식사하고 오시는 건 어떠냐고 한다. 자기들이 보고 있을 테니 걱정 마시고, 혹시 그전에 깨시면 연락드리겠다며. 이 친절함. 두 번째 나가라는 소리다. 하긴 병원 점심시간도 있고. 우리도 마땅히 거기 앉아 있을 명분이 없긴 했다. 점심 메뉴는 아귀탕. 아빠는 그 아귀탕을 드시기 위해 엄마를 기다리셨던 걸까? 혼자서도 잘 드시는 분이라 그렇게 단정 짓기는 좀 모순이 있었다. 뭐 어찌 되었든, 식당엔 왜 또 손님 하나 없는지. 이 어색함을 어떻게 풀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내 눈에 들어온 초록병. 아빠와 후쿠오카 여행 후 처음마시는 술. 명절 때도 금주 핑계로 안 마셨는데. 하지만, 금주 할애비라도 이 상황에선 필요할 것 같았다.

"아부지, 소주 한 잔 하실래요?"

"좋지, 안 그래도 시킬라 했다."

그럼 그렇지. 잔 두 개와 초록병 하나를 꺼내 와 두 잔을 따랐다. 아귀탕이 나오기도 전에 원샷! 닮은꼴 부녀다.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초록병 두 병과 점심식사가 끝나갈 때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점심은 죽이 먹고 싶다는 엄마를 위해 마침 병원 앞에 있던 죽집에서 전복 가득 죽을 주문하고, 푹 주무셔서 한층 미모가 오른 엄마는 그냥 간다는 내가 못내 서운했는지 집에 갔다가 가라고 계속 성화였다. 이미 세시가 다되어가는 시간이고 나는 집까지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야 하는데도.

"아, 고생했다. 아침부터. 어여 가라. 조심해서 가라."

아빠가 엄마를 채근해 집 쪽을 향해 팔을 당겼다. 아빠가 엄마 등을 잡고 길을 건너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데 '저 자리는 아빠가 아니면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자리, 돈 버는 재주가 없어 평생 엄마를 고생시킨 아빠지만 뒤늦게 엄마의 기사를 자처하는 모습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아빠의 핑크색 카드가 내 마음을 녹인 걸까? 아니면, 나이 들며 변해가는 아빠 스스로가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 걸까? 늘 문디나그네였던 아빠였는데 오늘은 아부지로 불러보기로 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한 지점'에서부터 나를 관찰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