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팬심이 일깨워 준 열정
몇 달간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날들을 보냈다. 귀에서 째깍째깍 시계 소리가 들릴 정도다.
나는 멈춰있는데 내 주변은 정확하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그 사이에서 내가 해야 할 최소한의 것들만 하면서 그 시간을 보냈다. 두문불출했으며 사람들과의 연락도 최소화했다. 물론 그럴만한 이유는 있었지만 스스로가 무기력해지기로 했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가족들조차도 내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단순히 의욕이 없다고 하기엔 부족하다. 아주 교묘하게 내 안에 있는 선천적 게으름과 의욕상실을 드러냈다. 싱크대 위는 깨끗하니 안을 열어보기 전까진 얼마나 엉망진창인지 모른다. 빨래는 매일 하지만 옷장을 열지 않는 가족들은 그 안 상태를 알 리가 없다. 예를 들자면 그런 식이다.
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교묘하게 숨겨두고 있다. 세상 제일 나태하고 남 탓만 일삼는 나쁜 내가 자꾸 삐져나오는걸 겨우 막고 있다. 다 세상 탓 같고 잘 나가는 사람들은 단지 운이 좋아서인 거 같아서 배가 아팠다. 그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는 보지 않으려고 했다. 입으론 번지르르하게 못할 것도 없지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다고 생각하니 매일이 불안했다. 겉으로는 뭐든 할 수 있다를 외치는 열정 가득한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겁쟁이에 게으름뱅이일 뿐. 그 사실은 나만 안다. 그래서 세상이 너무나 두려웠고, 이제껏 감추고 살아온 내 안의 진짜 내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게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회피하고 숨고 또 숨었다.
지나간 일들에 대한 후회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테고 그러한 이유로 삶 자체에 회의감이 들거나 무기력해진다면 내가 나약해서라고 밖에 설명할 말이 없다. 결국 우울도 나약함도 각자의 그릇 차이일 뿐. 그게 병으로 이어지는 것도 개인차일뿐이다. 세상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이 어찌어찌해서 일어나 다시 새로운 삶을 찾았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는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문제는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이대로 가다간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문득 바라본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너무 한심하다. 생기도 없고 핏기도 없다. 눈썹은 얼마나 안 다듬은 건지.. 매일 밤 혼자 술을 마시고 일정 시간이 되면 모든 스위치를 끄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블로그엔 매일매일 행복한 척 열심히 산 척 후기들을 올렸다. 그렇게 철저히 숨겨 둔 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애써 포장했다. 그렇게 아무 생각도 하기 싫고 아무런 계획도 하기 싫은 날들이 반복되었다.
며칠 전 BTS의 멤버인 지민이 생일을 맞았었나 보다. 플랜카드가 걸렸고 그의 생일은 해피지민데이가 되어 팬들의 축하를 공개적으로 받았다. 부산에서 세계박람회를 유치하기 위한 콘서트를 열게 되었고, 그들의 무료 콘서트를 보기 위해 어마어마한 팬들이 부산을 찾았다. 무료 콘서트에 당첨되지 않았어도 그들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산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굳이 수치를 보지 않더라도 부산을 조금만 돌아다니다 보면 느낄 수 있다.
지민이 태어난 곳도 아닌 우리 동네에 갑자기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며칠 전부턴 아예 관광버스를 대동하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민 아버지가 운영 중인 카페 방문 인증이 목적이다. 지민 아버지가 그 카페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지기 시작할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긴 한데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입국이 쉽지 않다가 이번 계기로 폭발해 버린 거다.
나는 이곳이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인 걸 본 적이 없다. 심지어 마을에서 외국인들을 이렇게 많이 본 적도 없다. 하루에 한 번 이상 지나다니는 곳이고 심지어 지금 사람들이 대기하고 기다리는 곳은 이 카페의 주차장이다. 캐리어를 끌고 히잡을 두르고 아빠와 딸로 보이는 부녀가 하하호호 너무나 즐거운 듯 인증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영화를 보는 거 같다. 다양한 국적과 다양한 관계의 사람들이 방탄 지민의 카페를 인증하기 위해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질 않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사는 동네에 BTS의 성지가 생겨버렸다.
이들의 팬심은 선택적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나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바다를 건너 이곳에 온 사람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관심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들에게 신선한 가르침을 얻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시간만 보내고 있는 나에게 이들의 열정은 너무 많은 메시지가 되어 다가왔다.
내 안에 있는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남 눈치 볼 것 없다. 본인의 감정대로 움직여라!
방구석에 처박혀 있지 말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라!
좋아하는 일에 주저 없이 앞서라!
지민 아버지의 카페에 왔지만 정작 그들은 지민을 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아티스트의 흔적을 좇아 낯선 동네까지 찾아온 그들의 열정을 감히 누가 욕할 수 있을까? 나는 그들처럼 무언가에 미쳐 열정적으로 찾아다닌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카페 앞에서 웃음 지으며 사진 찍고 있는 BTS 팬들의 모습이 나를 무기력의 소굴에서 구해준 거 같기도 하다.
일단 눈썹부터 다듬었다. 그리고, 미뤄뒀던 일들을 하나씩 처리하고 있다. 이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인정하는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그 다음 보여주고 싶은 내가 되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지 고민해보려고 한다. 내가 되고 싶은 열정 가득한 사람, 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겠지만 말이다. 사십이 훌쩍 넘은 이 나이에 자아분열을 겪고 있는 나란 사람.. 앞으로가 더 걱정이지만 좋아하는 연예인을 향한 팬심처럼 좋아하는 일을 찾아 그 마음을 불살라봐야겠다. 한 번쯤은 그리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