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내게 기묘한 꿈을 꾸었는데 기록하고 싶지만, 자신의 글쓰기로는 이 꿈을 도저히 적어낼 수 없다고 말했다. 녀석은 점심을 먹으면서 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자리를 옮겨 카페에서도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마침내 우리 집까지 와서야 그 이야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녀석의 말이 장황한 구석이 있고 구조가 뒤엉켜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많아 맥락을 따라잡기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확실히 녀석의 말대로 놈의 기묘한 꿈은 퍽 재밌는 기묘한 꿈이었다.
그냥 흘려보내기는 제 말대로 아까운 구석이 있어 이렇게 일기로나마 남겨보려 한다. 녀석의 말에 있었던 장황한 묘사나 이야기에 방해된다 싶은 부분은 삭제하는 등, 멋대로 녀석의 말을 다듬은 부분이 있어 실제로 녀석이 의도한 바를 잘 기록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름의 최선을 다하여 그 꿈을 여기에 적어둔다.
“그러니까 꿈에서 내가 치매에 걸린 노인인 거야. 깊은 잠에 빠지면 기억이 완전히 삭제되는 그런 치매 증세가 있는 노인이었어. 다행인 것은 내가 나에 대해 기록해 놓은 수첩이 있었다는 거야. 그 수첩은 앞, 뒤가 온통 까만색에 엄청 두꺼운 스프링 노트였어.
일어나보니 침대 앞에 수첩을 확인하라고 적혀져 있는 메모가 보였고 나는 완전히 머리가 텅 빈 상태에서 서랍에서 수첩을 꺼내 읽었지.
수첩을 열어보니 첫 장엔 내 기본적인 인적 사항이 적혀져 있었어. 난 신부였어. 그러니까 가톨릭 사제 말이야. 세례명은 사무엘이었어. 그리고 뒷장을 넘겨보니 메넬레오 원장님이라는 사람에 대해 적혀져 있었어. 어떤 상황에서나, 어느 순간에나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그 밑에는 대략 이런 내용이 덧붙여져 있었지. 6살에 고아가 된 나를 거두어 주신 자비로운 분. 그런데 그 부분을 읽자 누군가가 갑자기 뜨겁게 달군 쇳덩이로 머릿속을 지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그 고통을 따라서 어둡고 붉은 어떤 장면이 선명히 떠올랐어,
내 부모는 눈앞에서 피범벅이 되어서 고깃덩어리처럼 변해있었고 덩치 큰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지. 난 그 장면에 잇따라 몇 가지 기억이 되살아났지. 메넬네오 원장님은 그 사건 이후로 고아가 된 날 데려다 키워주셨고 난 그분을 따라서 신부의 길을 걷게 된 거였지.
난 깊은 슬픔과 감사함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드렸어. 경건한 마음으로 나를 채우고 나는 주께 나를 온전히 바친 사제로서의 하루를 마치고 잠들었어.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나는 전처럼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떤 기억도 없는 백지의 상태에서 깨어나 수첩을 확인하라는 눈앞에 붙여진 종이에 지시에 따라 수첩을 확인했지. 그런데 거기엔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은 거야. 전날 잠들기 전 내가 그 수첩의 앞과 뒤를 반대로 넣었던 거지. 아까 말했듯이 수첩은 앞과 뒤, 왼쪽과 오른쪽을 구분할 수 없는 두껍고 까만 스프링 노트였으니까.
나는 혼란스러웠어. 대체 나는 누구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한참을 침대에 앉아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는 듯한 기억의 미로를 헤매며 내 존재를 알아내려 했지. 그때 그 어둡고 붉은 방을 찾아냈고 그 문을 열자. 그날 밤의 기억이 물을 막아놓았던 둑이 터진 것처럼 내 정신으로 마구 쏟아져 나왔어.
그 기억을 되찾자 부모님에 대한 너무도 슬픈 연민의 감정과 그 커다란 살인자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내 영혼을 양편에서 잡고 찢어버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어. 이미 정신은 내 것이 아니었지. 난 온종일을 광인이 되어 벽을 마구 치며 통곡하며 울다가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던지고 화를 냈지. 결국 그날 밤 난 수도원 밖으로 빠져나와 뒷모습이 그 살인자와 닮은 한 사내를 죽였어.
어떻게 내가 그 사람을 죽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머리가 백지인 상태에서 내 몸에 모든 세포가 복수를 위해 작동하고 있었던 것 같아. 전보다 영민하게 일을 처리했고 동작도 노인답지 않게 민첩했지. 돌아와 나는 수첩에 부모님이 죽은 그날을 아주 자세히 묘사했고 오늘의 복수를 기록했지.
이제 난 살인자로서의 삶을 살게 된 거야"
“그럼 이제 완전히 연쇄살인마가 된 거야?”
“아니 내가 이 꿈을 기록하고 싶었던 건 다른 이유가 있어. 살인을 계속하던 나는 어느 날 신부일 때 저질렀던 실수를 똑같이 저질러 버린 거지. 앞과 뒤를 반대로 서랍에 넣은 거야. 다음날 나는 눈물을 흘리며 주께 기도를 드리고 메넬레오 원장님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경건한 하루를 보내는 거지.
이게 반복돼. 어떤 날은 신앙심이 깊은 신부, 어떤 날은 분노에 미친 연쇄살인마. 어때 재밌지 않아? 이걸 좀 잘 쓰고 싶은데 그게 마음처럼 안 써져. 첫 문장을 쓰고 깨달았지 난 글쓰기에 젬병이라는 걸. 누가 이걸 대신 제대로 쓴다면 제법 멋진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 아쉬워.”
난 동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 이야기를 머리로 굴려보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 녀석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앞, 뒷장을 모두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또는 그 기록들이 쌓여 마침내 두 기록이 만나게 되면?”
녀석은 좀 생각을 해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뒷장을 찢거나 자신을 찢어버리겠지.”
녀석은 무척 재밌는 농담을 한 것처럼 킬킬대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