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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편집실

공간의 소년, 멸망의 소녀

by 설다람

삼각형이 사각형을 찌르고 선이 원을 관통하는 도형의 난교 사이로 나는 하얀색 담요를 쓰고 걷고 있다. 황홀경에 도달한 도형들은 비명을 질러대고 난 더욱 단단히 담요를 부여잡는다. 다행히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이는 아무도 없어 보인다. 내 앞으로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나 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발자국에서는 각자 다른 냄새가 난다. 생선 비린내, 폴 냄새, 썩은 계란 냄새, 꽃 냄새, 나는 생선 비린내를 따라가기로 한다. 비린내가 나는 발자국의 사내는 아마도 작은 삼각형과 사각형을 잡는 어부였을 것이다. 그는 튼튼한 밧줄을 만들 줄 알았을 것이고 어디에 난교를 끝내고 퍼질러 자고 있는 도형들이 모여 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난 지금 그의 길을 따라서 걷고 있는 것이다. 그의 발자국 위로 내 발자국을 겹쳐 남겨가며 그가 했을 동작을 흉내 내어 보았다. 밧줄도 없이 도형들을 끌어당기는 시늉을 하면서 옆에 누워있는 거대한 도형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직도 절정의 순간에 있었다.

비린내 나던 발자국이 끊어진 곳에서 나는 멈추었다. 여기서 도형을 낚아 올리던 사내의 단단한 어깨와 억센 팔은 하늘로 날아 올라갔을 것이다. 그에겐 자신을 잡고 올라가는 줄의 정체를 파악할 틈도 없었을 것이다. 난 하얀색 담요 속에서 그의 최후를 그려보았다. 견고한 석상 같았을 그가 무력하게 잡혀 올라가는 것을, 그는 여기까지 수많은 도형을 잡아 왔지만 자신 또한 누군가에게 잡힐 무엇이었다는 것은 알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무지가 외롭게 느껴졌다. 나는 하얀 바닥에 두 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것은 그를 위한 무덤이었다.

아무도 나를 볼 수 없게, 내 눈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나는 하얀색 담요를 발부터 머리까지 덮고 바닥을 굴렀다. 담요는 몸을 칭칭 감았다. 하얀색 담요가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나는 잠을 청했다. 꿈속에서 나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했다. 도형들이 난교를 시작할 때 하얀색 담요를 휘두르며 나는 소리를 질렀다. 즐거움을 방해받은 도형들은 사납게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대담하게 그들 위로 뛰어올라 하얀 담요를 검으로 만들어 그들의 등을 찔렀다. 그러나 검에 찔린 도형의 조각은 다른 도형이 되었고 사방으로 수많은 조그만 도형이 튀어나갔다. 속력을 가진 작은 도형은 커다란 도형보다 빠르고 위험했다. 그들은 내 시야 밖에서 나를 향해 날아와 나를 통과했다. 곧 내 몸 곳곳에는 작은 도형이 만든 구멍이 나있었고 이제는 ‘그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그곳에 존재했다. 나는 그렇게 나라는 구멍이 되었다.

눈을 떠보니 나는 아직 구멍이 아니었다. 다만 하얀 담요 속에 있었다. 피로가 몰려왔다. 피로는 벌레처럼 나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고 아무리 털어내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집요한 피로의 공격을 물리치는 것을 포기하고 나는 하얀색 담요로 만든 요새를 조금 열어 밖을 보았다. 도형들은 잠들어 있었다. 나는 완전히 담요를 걷어냈다. 조심스럽게 가장 가까이 있던 삼각형으로 그것의 테두리를 만져보았다. 딱딱한 삼각형의 표면이 느껴졌다. 어떤 결함도 없을 것 같은 매끈함이었다. 천천히 삼각형의 테두리를 따라 걸으며 도형의 숨소리를 들었다. 도형의 숨소리는 자신의 모습처럼 삼각형이었다. 삼각형으로 허공으로 뱉어졌다 삼각형으로 바닥으로 떨어졌고 삼각형으로 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삼각형으로 사라졌다. 하나의 숨소리를 사라지기 전에 담요로 잡아 손 위에 올려보았다. 삼각형은 내 손에서 느린 팽이처럼 비틀거리며 삼각형을 그렸다. 난 그것을 꽉 움켜잡고 왼쪽 주머니에 넣고 자고 있는 삼각형을 돌아 나왔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삼각형의 숨소리가 걸을 때마다 허벅지를 긁어댔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자고 있는 거대한 도형들이 뱉는 숨소리를 피해가며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사실 내가 걷고 있는 것은 바닥이 아니라 숨소리의 강물이었다. 자신의 주인을 꼭 빼닮은 숨소리들은 자기들끼리 부딪치면서 더욱 작은 도형이 되었고 더욱 작은 도형에서 점이 바뀌어졌다. 난 이제 도형들이 두렵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다시 깨어난다고 해도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담요로 무찔러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 담요로 무엇인가 떨어졌다. 나는 강물에서 튀어나온 점이려니 하고 털어내려고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도형의 조각에서 만들어진 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전히 담요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색’이었다. 본능적으로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느꼈다. 나는 숨소리의 강물을 타고 노는 일을 멈추고 안전한 곳을 찾아보았다. 투둑하는 소리가 잦게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니 거대한 도형들이 색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색으로 색은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떨어졌고, 왼쪽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담요로 다시 한번 온몸을 감쌌다. 담요 속으로 들어가자 사방에서 색이 떨어져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색의 폭풍우였던 것이다. 담요를 꽉 붙잡고 나는 숨소리의 강물의 흐름을 따라 흘러갔다. 폭풍우는 쉽게 그치지 않고 더욱 거세어졌다. 이제 숨소리의 강물은 잔잔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색과 도형으로 굽이쳤고 도형의 경계를 지우고 바닥 속으로 휘몰아쳤다.

강렬한 흔들림이 계속되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어떤 색도 담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담요를 붙잡고 있는 것뿐이었다. 거대한 속력으로 달려와 부딪치는 색의 흐름이 느껴졌고 나는 색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거센 색의 요동이 사라지고 난 뒤 눈을 떴을 때 나는 내 몸이 색에 침범당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살구색 피부에 검은 머리를 한 소년이 되어있었다.

담요를 걷어내자 도형과 직선은 모두 사라지고 대신에 숲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처음 숲을 보았지만 그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곳이 하얀 자작나무의 숲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난 자작나무를 좋아했다. 그냥 좋았다. 하얀색이어서 좋다고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나무들 사이로 대답은 지나가버렸다. 떠나가는 하약색이어서 좋다는 말을 보며 잘 가라고 인사를 보냈다.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지팡이 삼고 길을 걸었다. 숲내음이 코를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숲과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었다. 내 피에는 숲의 향기가 스며들었고 나의 숨에는 숲의 숨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우린 하나가 되진 않았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기분이 들떠서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길을 걸었다. 나뭇잎 내 노랫소리를 좋아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무 사이를 걷는 것은 정말로 즐거웠다. 내 걸음은 더욱 빨라졌고 흥얼거리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때 숲속 어딘가에서 내 노랫소리보다 훨씬 큰 소리로 울부짖는 짐승의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서 가보니 그곳엔 쓰러져 있는 거대한 코끼리가 있었다. 코끼리는 나를 보자 코를 휘저으며 내게 도와달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불을 피웠다. 하지만 누구도 우리를 발견해주지 못 했고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선 구조라는 익숙한 단어가 떠올랐다. 우린 구조가 필요했다. 그건 처음으로 겪는 밤이었다. 하얀 자작나무는 차갑게 얼어있었다. 숲은 겨울이 되었다. 내 마음만이 봄이었다. 봄은 겨울을 두려워했다 코끼리에게도 그걸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숨기 위한 변명이었다. 겨울이 봄을 싫어하는 것이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날은 밝아올 것이다. 어서 말을 하라고 나뭇가지들이 채찍처럼 내 등짝을 후려갈겼다. 상처가 깊게 파이고 푸른 피를 흘렸다. 한줄기 물이 되어 흐르는 피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강물이 되어 바다로 떠났다. 그들을 따라가고 싶어 뛰었지만, 강물은 빠르게 빠르게 흘러갔다. 기다려달라는 내 말은 바람 소리에 묻혔다. 결국 말은 내게 돌아와 나를 다그쳤다. 기다려줘. 나는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며 말했다. 기다려줘. 내 말은 하늘에 닿지 못하고 떨어져 비가 되었다. 숲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코를 휘젓지 않는 코끼리를 강물에 떠나보내고 젖은 채로 길을 걸어야했다. 자작나무 숲의 배경은 비로 인해 지워졌고 그 자리엔 시멘트벽이 드러났다. 나는 사방이 시멘트벽으로 이루어진 곳에 있었다. 콘크리트 미로였다. 거기 누구 있어요. 아무도 없다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럼 당신은 누구시죠? 나는 네 목소리야. 그럴 리가요. 지금 대답하고 계시잖아요. 그렇다고 내게 다른 누군가는 아니지.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서 미로를 헤매었지만 벽을 돌아서면 벽이 있었고 어떤 벽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소리쳤다. 무슨 말이지? 벽이 되물었다.(비록 벽은 자신이 나라고 주장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소녀 한 명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축제가 벌어질 것이다. 나는 정말로 대는 대로 지껄였다. 내 말을 들은 벽은 알았다는 듯이 뒤로 넘어졌고 하나의 벽이 넘어지자 모든 벽이 넘어졌다.

그 너머로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한 소녀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축제의 거리가 내게로 이어졌고 나는 회오리 감자를 사 들고 거리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들은 흥에 겨웠고 몇몇은 취해있는 상태였다. 축제였다. 옆을 지나가던 신사에게 무슨 축제냐고 물었다. 그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하늘 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소녀를 가리켰다. 소녀가 왔어요. 그게 축제의 상징인가요? 아니죠, 축제 그 자체에요. 소녀가 왔기 때문에 축제가 벌어진 거죠. 소녀는 축제를 우리에게 내려줬어요. 그럼 소녀가 누구기에 축제를 열어야 하는 거죠? 방금 말했다시피 우리가 축제를 연 게 아니라 소녀가 내려준 거예요. 그는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졌더니 관람차와 아이들이 모여 있는 코끼리 우리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가 가리켰던 소녀를 바라보았다. 날개도 없이 소녀는 잘도 하늘을 휘젓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소녀를 향해 내가 소리쳤다. 소녀는 내 말을 듣지 못했다.

분명 벽의 미로보다는 나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긴 벽들이 사람과 축제의 형상을 하고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한데 왠지 소녀만은 달라보였다. 높은 곳에 있기에 벽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일까. 나는 소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해 관람차를 탔다. 관람차가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나는 문을 열고 소녀에게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죠? 이번엔 소녀가 내 목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누구죠? 소녀는 반문했다. 관람차는 꼭대기에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당신을 알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 말을 들은 소녀는 관람차에서 나를 꺼내어 하늘로 올렸다. 공중에 떠 있었지만 떠 있는 느낌도 들지 않았고 소녀가 내 손을 놓아도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아주 편안한 곳에 끼여 있는 기분이었다. 누구도 오지 못 할. 왜 나를 불렀죠? 궁금했어요. 사람들은 당신이 축제를 내려줬다고 했어요. 그건 저 사람들의 착각이에요. 지겹죠. 그들은 언제나 날 오해해요. 저는 저들을 멸망시키러 왔어요. 나는 소녀의 말을 듣고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저들은 모두 당신을 좋아하는데? 나를 좋아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중요한 건 제가 왜 여기에 왔느냐는 것이죠. 그게 멸망인가요? 그래요. 씁쓸하네요. 저렇게들 즐거워하는데 나는 땅에서 솜사탕을 쥔 아이의 손을 잡고 행복한 표정으로 걷는 가족을 보며 말했다. 저랑은 상관없어요. 소녀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소녀의 단호함이 무서워졌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나요?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이렇게 이야기 나눴으면 좋겠어요. 당신도 멸망시킬 거예요. 그렇다면 더더욱 여기서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왜죠? 멸망의 순간에 혼자 있는 것보다 누군가랑 있는 게 나으니까요. 나는 해본 적도 없는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당신도 사라지나요? 저도 그렇겠죠. 씁쓸하겠네요. 저에겐 그런 감정은 없어요. 다행이네요. 뭐가요? 당신은 슬퍼하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는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밑에서 취한 젊은 무리의 노랫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멸망까지 얼마나 남았죠. 앞으로 121바퀴만 더 돌면 돼요. 그러면 우리도 좀 더 즐겨요.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의 손을 잡더니 이내 하늘을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린 빙빙 돌았다. 즐겁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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