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남역 4번 출구를 나오면 고급 레스토랑과 프랜차이즈 커피 체인점이 늘어선 큰 길이 보이고 그곳에서 한 칸 뒤로 가면 터줏대감처럼 좁은 골목을 지키고 있는 오래된 동네 커피집들이 보인다. 그중 하영 다방과 빅텐 사이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 한참을 걷다 보면 파란문의 집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오른쪽을 꺾어 지나온 길만큼을 더 걸어 들어가면 하얀 벽이 이어져 마치 하나의 집처럼 보이는 여러 채의 집이 있다. 그리고 그 벽 왼쪽 귀퉁이에 ‘초록 지붕의 앤’이라는 술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술집에 들어서기도 전에 취할 대로 취한 사내가 문을 열고 ‘초록 지붕의 앤’의 문을 열고 들어와 주문대 앞으로 간다. 그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바텐더에게 불분명한 발음으로 웅얼거리며 주문했다.
“이봐아,.으.으악을 줘.”
“네? 손님?”
바텐더가 그의 주문을 못 알아듣자 그는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으으막을 달라고 이 이 머저리야 이렇게 소리를 질러야 알아먹겠어?”
바텐더는 취한 사내의 무례에도 평온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손님도 아시다시피 손님의 상황을 듣지 않으면 처방이 불가능합니다.”
“상황, 내 상황이라고? 빌어먹을 이 꼴을 보고도 모르겠어? 썅 이젠 이런 쪼다새끼도 날 무시하.하네?”
“아닙니다. 이제는 알 것 같네요.”
바텐더는 몸을 뒤로 돌려 정렬되어 있는 무수히 많은 봉지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바텐더는 결정했다는 듯이 봉지 하나를 꺼내어 사내에게로 돌아왔다.
“손님 나왔습니다.”
그는 거칠게 봉지를 낚아채 구석 자리로 가 봉지를 뒤집어썼다. 봉지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의 몸은 봉지와 함께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의 신음소리가 봉지를 뚫고 흘러나왔다. 미안해,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 걸 알잖아. 너도. 그래 너도 잘 못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겠지. 아. 아. 사내는 봉지 속 누군가에게 말했다. 봉지는 그의 숨에 맞춰 구겨졌다 펴졌다.
“지치겠는 걸.”
앞자리에 혼자 앉아 있던 여자 손님이 바텐더에게 말했다. 거의 남자처럼 짧게 자른 머리에 깔끔한 정장 차림의 단골 여자였다. 여자는 구석의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 일인걸요”
그는 방금의 소란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나도 음악이 필요해.”
“요즘은 어떠신가요?”
여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농담이었어.”
바텐더는 알겠다는 뜻으로 끄덕이고는 자신이 할 일을 했다.
“너는 한 잔 안 해?”
그녀는 그를 보며 자신의 잔을 흔들었다.
“잘 아시다시피 훌륭한 바텐더는 수많은 명주 속에 둘러싸여 있어도 술을 마시지 않는 법입니다. 그의 역할은 좋은 술을 손님에게 드리는 것이지 좋은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니까요.”
“고지식한 오빠네.”
“제 직무에 충실하다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 대답도 너무 고지식해. 제 직무에 충실하다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오글거려. 뻔하디뻔한 소리. 따분하다고 여기나 저기나.”
그녀는 술을 한 번에 다 마시더니 빈 술잔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말했다.
“아까 저 사람한테 준 건 뭐야? ‘따끔’의 ‘별나라 사람들은 생식기를 잃어버렸어’? 뭐 그런 거려나?”
“그건 저 손님과 저만의 비밀입니다.”
“고지식한 남자는 매력 없다고, 그런데 오빠는 매력 있네. 고지식한 매력이라 이상해.”
그녀는 취한 것처럼 혀가 꼬인 발음으로 말했다. 취하지 않아도 취한 척하는 것 그녀의 습관이었다.
“좋아, 나한테도 하나 처방해줘. 귀를 내밀어줘 말해줄게 나를.”
바텐더는 몸을 숙여 그녀에게 귀를 내밀었고 그녀는 그의 귓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바텐더는 움직이지 않고 그녀의 혀가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의 표정에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 침착하게 혀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가 혀를 도로 자신의 입으로 넣자 그는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뒤를 돌아 봉투를 뒤적였다. 바텐더는 봉지를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그녀는 봉지를 잡고 핸드백 속으로 집어넣었다.
“집에 가서 뜯으시면-”
“알고 있어, 걱정하지 마”
그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바텐더는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느 지방에서 오셨나요?”
“연서 출신이야. 갑자기 그건 왜? 사투리 때문에? 거의 티가 안날 건데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지겨울 정도로”
“아니요 사투리가 아니라 그냥 이쪽 분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래? 그럼 뭣 때문이지 사실 별 상관없잖아? 어디서 왔든 어디에 있든, 사투리를 쓰든 사투리를 안 쓰든.”
“상관없죠.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과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에겐 큰 사실이겠지만.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대개 이상한 미련으로 세상을 구분 짓고는 하지요. 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에요. 다만 단골 분의 고향정도는 알고 싶어서요.”
“이제 알았으니 됐네, 근데 그런 종류의 사람은 싫어하는 거야?”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우려라고 해야 할까요? 걱정이 되는 거죠. 그 사람들의 삶이, 사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우려를 가장한 불만일 수도 있지. 쉽게 말해서 그런 게 넌덜머리가 난다는 말이잖아. 그렇게 보면 이상한 미련으로 그걸 신경 쓰고 있는 건 댁인 거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죠.”
“이런 게 프랑스식 대화인가. 피곤하네. 물론 가본 적도 없지만 나랑 프랑스에나 갈래 멋진 오빠?”
“기회가 된다면요,”
바텐더는 예의 상냥함으로 그녀를 대했다.
“제발 연락해줘.”
투명한 술잔을 보던 그녀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더라구.” 그녀는 술잔을 들어 조명에 비추었다. 빛은 술잔을 통과해 여릿한 색으로 번져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빛 속의 그녀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빛 속에서 말을 이어나갔다.
“하나 있어. 그 애 참 웃겨 보고 있으면. 나랑 있으면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대. 자기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대. 함께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하루가 특별하게 변한다나. 어이가 없어서. 그 앤 영화를 너무 많이 봤어.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심각한 거지. 나도 양심이란 게 있어서 솔직하게 말했지 너랑은 사귈 마음이 없다고 그리고 나는 네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좋은 여자가 아니라고.
그랬더니 그 애가 그건 상관없다는 거야.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내가 잊어버렸다고 당신은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고 자신에겐 유일한 구원이라고. 정말 어리지 않아? 감정적이고 어리고 서툴러. 정작 본인이 좋아하고 있는 건 자신이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람이라는 사실인지도 몰라. 걔는 아직 그걸 모르고 내게 계속 그런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야.
아니, 어쩌면 알면서 그걸 즐기는 지도 모르지. 집으로 돌아와서 거울을 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어떻게 난 그녀를 이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그녀를 정말 원해. 가지고 싶어 미치겠어. 진지한 만남이 아니어도 좋아. 다른 남자가 있어도 좋아. 잠시라도 그녀와 있길 원해. 그녀가 힘들 때 날 떠올리길 바라. 비록 진짜로 만나는 남자는 내가 아니더라도. 어쩜 이리도 한심할까. 하면서도 그 애는 나를 놓지 못해. 어리광이지. 변명이야. 환상으로 자위하는 지독한 나르시스트지. 그 애는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내게 집착해.
그래서 난 아직 그 애를 버리지 않았어. 그 애를 버리는 행위가 그 애를 자극시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게 그 이유 중에 하나니깐 말이야. 그 애는 내칠수록 더 세게 내게로 돌아와. 나중엔 아마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할걸. 피곤해, 피곤해.”
“요즘 만나는 그분은 괜찮은가요?”
“은근히 날 신경 써주는구나.”
“손님이 신경을 쓰고 계시니까요.”
“별생각 없어.”
“지금 만나는 사람 말입니까? 어린 쪽입니까.”
여자는 술잔을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이런 이야기는 넌덜머리가 나 그것보다 네 이야기를 해줘. 적어도 내 이야기보다는 재밌겠지.”
“제 이야기라고 더 나은 게 있을까요. 저는 그저 여기서 술을 팔고 있습니다. 손님 같은 분을 위해서요.”
“언제쯤 부서지는 거야. 그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태도와 말은? 가식쟁이.”
“천성이라 여간해선 부서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부서지긴 한다는 거네.”
“저도 사람이니까요.”
“누구 때문이었어? 보나마나 여자겠지?”
바텐더는 대답하지 않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의 미소는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자신의 추함을 반사시켜주는 듯한 깨끗한 수면 그것에 비치는 자신에 추함을 보면 달달하게 밑에서부터 부끄러움이 일렁였다. 그것이 그의 미소의 정체였다.
반반한 얼굴의 미소는 모든 사람의 추악함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그의 미소에서 이리저리 비틀리며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마냥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술을 마실 때처럼 씁쓸하면서도 떼어낼 수 없는 달콤함. 그녀는 자신의 추악함을 홀짝였다.
“누군가를 좋아해보고 싶어.”
그때 구석에 있던 사내가 봉지를 다 들이마시고 탁자 밑으로 떨어졌다. 바텐더는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있었다. 괜찮냐고 묻는 바텐더에게 그는 괜찮다고 손짓을 했고 고장 난 몸이 맛이 간 정신을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갔다. 그는 완전히 꽐라가 된 상태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텐더가 카운터로 돌아왔을 때 여자는 자리에 없었다. 대신 그녀가 마셨던 술값이 그 위에 올려져 있었다.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인 바텐더는 태연하게 지폐와 동전을 집어 카운터 금고에 넣었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뒤를 돌아 쌓여져 있는 음악과 술을 보았다. 다음 손님은 무엇을 찾으려나. 여자에게 가끔 자신도 부서진다는 사실을 고백했던 것이 그는 마음에 걸렸다.
그 여자가 워낙 순수해서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어. 바텐더는 퇴근할 때 코넬리 25년산과 다다라다의 일곱 번째 앨범을 챙겨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시 술과 음악은 혼자 있을 때 최고의 맛을 내지. 그는 오른쪽 발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아까 여자의 눈망울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다들 그런 말을 하는 거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