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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편집실

벽과 벽의 벽

by 설다람

내가 우리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의 하나는 양사중학교에서 내려오는 길옆의 콘크리트 담 중간에 우리 집 아파트로 나 있는 구멍처럼 보이는 샛길이다. 처음에 아파트로 올라가기 위해 샛길 속으로 들어서면 앞과 왼쪽으로는 시멘트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전까지 마치 콘크리트 상자에 갇힌 기분이 든다. 난 그 콘크리트 벽이 주는 특유의 갑갑한 압박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 장소의 묘미는 압박감이 최대가 되는 순간 오른쪽으로 난 계단을 타고 아파트의 놀이터로 올라오는 것이다. 그러면 마치 탱탱하게 잡아놓았던 고무줄을 놓아버리는 것 같은 탄력적인 해방감이 느껴지고 다시 세상이 보인다. 그것이 이 샛길의 매력이었다. 샛길은 들어서기 전까지는 오른쪽에서 누가 내려오고 있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가끔 샛길로 들어서는 순간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과 뻔한 적도 있었다.

이런 독특한 공간의 특성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장소이지만 내가 이 샛길을 좋아하는 이유엔 한 가지 굉장한 비밀이 숨어있다. 그 비밀은, 믿기 힘들겠지만, 처음 샛길을 들어가서 보이는 왼쪽 벽으로 동시에 두 발을 올리면 땅에서 서 있는 것처럼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상태의 나를 누군가가 바라본다면 마치 내가 벽에 단단히 고정된 못처럼 보일 것이다.

내가 이 비밀을 알아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심야 영화를 보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던 날이었다. 샛길로 들어서면서 나는 그날 봤던 영화 주인공을 따라 한답시고 왼쪽 벽으로 발을 차고 오른쪽으로 난 계단으로 돌아서 내려오려는 생각으로 힘차게 뛰어올라 왼발로 벽을 쳤다. 그 순간 난 아주 짧게 왼발이 벽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벽을 차고 오른쪽을 보며 떨어진 나는 뒤를 돌아 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콘크리트밖에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벽으로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벽의 표면을 짚어보았다. 차가운 벽의 온도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아까 뛰었던 자리로 돌아가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뛰어 두 발을 동시에 왼쪽 벽에 붙여보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두 발을 동시에 왼쪽 벽에 붙이자 나는 말 그대로 왼쪽 벽에 서있었다. 나는 한 발을 떼고 조금 앞으로 가보았다.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 거기엔 지구의 중력과 다른 중력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난 왼쪽 지구로 넘어간 것인지도 몰랐다. 난 위를 쳐다보았다. 아파트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내가 들어왔던 샛길의 입구를 바라보니 도로 위에 차들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몇 걸음을 더 걸어 왼쪽 벽면의 끝에서 계단으로 발을 옮기자 난 곧바로 계단으로 떨어졌다. 갑작스런 낙하에 온 몸이 부서질 듯 아팠지만 난 샛길의 비밀로 인한 흥분으로 이미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날 이후로 인적이 드문 밤마다 왼쪽 지구로 여행을 다녀오는 것은 내 일상에 꽤나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일단 왼쪽 벽에 붙기에 성공하면 정면 벽, 왼쪽에 붙은 다음에는 눈앞에 바로 보이는 벽, 까지는 각 벽면으로부터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계단을 뛰어넘어 반대편 벽에 붙으려고 하면 두 발을 떼는 순간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은 현실로 돌아오고 온 몸은 계단으로 곤두박질친다. 즉 처음에 샛길로 들어섰을 때 보이는 왼쪽 벽과 이어져 있는 벽까지가 샛길이 가진 신비로운 비밀의 한계선이라는 것이다.

비록 매우 좁은 공간이지만 그곳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하늘로 올라가는 차들을 바라보면서 저렇게 올라간 곳이 결국 노세교회가 있는 곳일 뿐이며 삼거리에서 신호에 걸린 차들은 기다렸다가 직진을 하거나 우회전을 할 것이라 생각을 하니 역시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그나마 나았다.

나는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이 오직 나뿐이기를 바랐다. 밤마다 이곳을 찾아서 이런 짓거리를 하는 인간이 나 말고는 없었던 거로 보아 아마도 나뿐일 것이었다. 다행이었지만 언제 누가 이 비밀을 알아낼지는 모를 일이었다. 왼쪽 벽에 앉아 비밀의 한계선을 넘을 방법은 없을까 고민했다. 내가 저 계단을 넘어 반대편 벽으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그곳의 중력은 오로지 나만의 차지가 될 것이다. 반대쪽 벽에서 왼쪽 벽을, 아마도 그때는 정면을, 바라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난 계단을 뛰어넘어 반대편에 닿는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먼저는 학교 운동장에서 멀리 뛰기를 연습했고 후에는 실전이었다. 몇 번 아스러질 정도로 계단에 부딪히고 난 뒤에야 난 이게 단순히 뛰기의 문제가 아닌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강한 추진력으로 뛰어도 두 발을 떼는 순간 현실의 중력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힘의 방향 또한 바뀌는 것이었다.

혹시 손을 붙이면 바꿔진 중력이 유지될까 싶었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설마 이 벽이 나의 의도를 눈치채고 나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왜냐하면 신기하게도 반대편 벽으로만 뛰지 않으면 바닥의 중력은 나의 행동을 크게 제약하지 않았다. 실제로 중력의 방향이 바뀐 후 반대편을 뛰어넘지 않을 목적으로 살짝 두발을 떼보았을 때는 곧바로 바닥, 그러니까 왼쪽 벽으로 떨어졌다.

벽의 의지는 완고했고 나의 의지는 약했다. 반대편으로 넘어가려는 시도를 포기한 순간부터 왼쪽 벽은 내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다. 깡충 깡충 뛰어도 절대로 현실의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고 가끔은 우주에 있는 것과 같이 무중력을 경험하게 해주기도 했다.

과연 이 녀석의 말을 따르면 얼마큼 높이 뛸 수 있나 확인하려고 뚫려 있는 샛길의 입구, 그러니까 왼쪽 벽과 이어진 벽을 바닥으로 서면 천장이 되는 곳을 향해 있는 힘껏 뛰었다. 떨어질 각오로 눈을 꽉 감은 채 두 팔로 몸을 감싸며 공중으로 몸을 띄운 난 내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을 보았다.

눈을 뜨자 샛길 입구 바깥에 나 있는 길이 보였고 내 몸은 말 그대로 떠 있었다. 그러나 다시 천천히 내 몸은 바닥, 그러니까 아까 내가 뛰었던 지점으로 돌아갔다. 그 사건은 내게 이 벽에게는 확실히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이 벽은 자신들에게 속한 상태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조정할 수 있었다. 그것을 안 이후로는 반대편으로 가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세차게 비가 퍼붓던 날 밤 문득 이 순간에 왼쪽 벽에 앉아 있다면 빗방울은 어떻게 떨어질까 궁금해졌다. 난 부모님이 잠든 사이에 아주 늦게 집을 나왔고 샛길 앞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왼쪽 벽으로 뛰어 들어갔다. 비는 여전히 위에서 아래로 그러니까 왼쪽 벽에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리고 있었고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어보였다. 나는 ‘뭐 별 거 없네’라고 생각하고 돌아가기 위해 뛰면서 떨어뜨린 우산을 주우려 몸을 숙였다.

몸을 앞으로 굽히던 순간 갑자기 세상의 모든 방향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고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그대로 한 바퀴를 돌았다. 나는 또다시 계단이나 현실의 바닥으로 떨어지는가 싶어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지만 나는 어느 곳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어딘가 안전하게 착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을 뜨자 알 수 있었다. 내가 착지한 곳은 그토록 가려고 했던 반대편 벽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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