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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편집실

열매 일기

by 설다람


“이게 네 일기장에서 나왔다고?”

책상 위에서 시작된 손목만 한 굵기의 나무 기둥이 수많은 가지를 뻗어낸 모습을 보고 여율이 말했다.

‘그렇다니까 믿어져?’

라영의 말을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과연 책상 위에 놓인 손바닥 크기의 일기장로부터 나무는 자라고 있었다.

“네 조언대로 어렸을 때 기억이 나는 것을 최대한 자세히 적어나갔어. 초등학교 때 단짝이랑 싸웠던 기억 같은 거 말이야. 처음엔 어렵더니 네 말대로 쓰다 보니 기억나지 않았던 것들도 차츰 떠오르기 시작했어, 그 후로 장면 하나 하나를 더 잘 묘사할 수 있었고 문장도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지. 그렇게 매일 과거를 새로 쓰기 시작했어. 그러다 마침내 태어난 장면에서부터 어제까지 이야기가 서로 맞닿게 되었지.

그 다음날 일기를 쓰고 아침에 눈을 뜨니 조그만 가지가 일기장에 나 있었어. 사실 그때는 뭔가 떨어졌거나 연필이 꽂혀 있다고 생각했어, 아침 수업에 늦어서 모자만 눌러쓰고 바로 달려 나왔거든. 근데 돌아와 보니”

“저게 자랐다고?”

“그게 말이 돼?”

“그건 내가 너한테 묻고 싶은 질문이야.”

여율은 손으로 나뭇가지를 더듬어 보았다. 진짜 나무였다. 나무 기둥을 흔들어 들어내려고 해보았지만, 책상에 박힌, 정확히는 일기장에 박혀있는 나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라영은 근심어린 눈빛으로 여율을 바라보았다.

“톱으론 잘라내야 하는 거 아냐?”

“여기 뭔가 달려있어, 열매인가 봐.”

여율이 한 가지 끝에 매달린 붉은 모양의 탁구공만한 열매를 가리켰다.

“이게 열매도 달린다고? 소름 끼치잖아. 야 어떻게 좀 해봐. 자르자 그냥 우리 이건 자르자?”

“뭐가 적혀있는데 4. 1 14:00 – 상철 선배가 계단에서 넘어진다. 넘어지면 열매, 넘어지지 않으면 가지”

“그게 대체 뭐야? 4. 1이면 내일이잖아? 아무래도 불길해. 잘라버리자.”

여율은 들고 온 실톱으로 일기장에서 나온 나무를 잘라내었다. 하지만 밑동만은 책상과 일기장 깊이 박혀있어 빼내지 못했다. 라영은 이정도면 잘 수는 있겠다고 말하며 밑동은 내일 제거하기로 하고 여율을 돌려보냈다.


다음날 14: 34 여율에게 라영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미쳤나 봐 어떻게 해”

불안에 떨리는 목소리로 라영이 말했다.

“무슨 일인데?”

“방금 전에 상철 선배가 계단에서 넘어져서 병원으로 갔대.”

“심하게 다쳤어?”

“몰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나무가 맞췄어. 뭔가 해야 해. 무당이든 퇴마사든 뭐라도 불러서, 아니 당장 다른 집으로 이사 가야겠어.”

“진정해, 별 일 아닐 거야. 오늘 확인해보고 문제 있으면 오늘은 우리집에서 자.”

“그래, 그러는 게 좋겠어.”

모든 수업이 끝나고 둘은 함께 저녁을 먹었고 카페에서 나무에 대해 이야기했다. 라영은 겁에 질려있었고 여율은 사실 그 일에 큰 관심이 없었다. 라영은 떨고 있었고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곤 여율 말고 없었다. 이대로 계속 라영이 적당한 불안 속에서 자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도 좋을 것 같다고 카페에서 여율은 생각했다. 하지만 라영의 집에 들어섰을 때 여율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무가 어제처럼 자라나있었던 것이다. 여율은 안 되겠다며 오늘은 우리집에서 자자고 말했다. 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당장 다른 집을 알아보자고 라영을 달래며 여율은 자신의 집으로 라영을 데려갔다.

그 나무는 대체 무엇일까. 분명히 어제 잘라내었는데 어떻게 다시 자랐지? 아니 애초에 나무가 일기장에서 자란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라영이 코골며 자고 있을 때, 여율은 베개로 귀를 막고 생각했다. 여율의 물음은 서로의 꼬리를 잡고 혼란스럽게 머리 위를 돌았다.

곁에 누운 라영은 언제 벌벌 떨었냐는 듯이 만사태평해보였다. 잠이 이길 수 없는 두려움은 없는 것 같았다.


그 나무가 어찌됐든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여율도 정신의 불을 끄고, 잠들었다.


그날 라영의 집에 다시 자라났던 나무에는 어제와 같이 열매 하나가 달려있었고 그 열매에는 이런 글이 적혀져 있었다.


‘00:00 여율의 집 밑에서 작은 불길이 시작된다. 시작되면 열매 안 되면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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