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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편집실

코끼리 물뿌리개

by 설다람


한 사람이 있어, 그래 그 사람은 청년이야. 청년이지만 그렇다고 활기차거나 의욕적인 인간은 아냐. 이를 테면 이런 인간이지, 삶의 페달을 부지런히 밟아가고 있긴 하지만 딱히 그것이 삶을 움직여가게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다만 내리막길이라서 발과 페달이 함께 돌아가고 있는 것뿐이야. 그냥 발을 올려둔 채로 발을 돌리는 시늉만 하면 되니까. 여하튼 그런 인간이야. 내리막길에 자신을 내맡겨둔 한심한 대학교 2학년 생, 군대를 앞두고 있고, 자취방에서 식물을 키워. 그런데 이 녀석이 식물을 키우는 방식은 사실 키운다는 것보다 천천히 편안하게 오랜 시간을 들여서 죽이는 것과 비슷해. 녀석이 고르는 식물은 온전하고 살아 있는 것들이 아니라 계절의 틈에 빠져버려 제 계절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어나가고 있는 것들을 거두어 오는 것이거든. 즉 이른 겨울 무심한 꽃집 주인 탓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추위의 조짐을 가늠하고 있는 트리안이나, 싱고늄 같은 것들이야. 그런 식물들은 오래 살 수가 없어. 자신이 계절을 놓쳐버린 채 밖으로 쫓겨났으니까. 문제는 청년은 옆에 있는 싱싱한 놈들을 내버려 두고는 꼭 그런 놈들만 골라온다는 거야. 이상한 청년이지?

그렇다고 그런 놈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관리를 해주지 않는가 하면 또 그건 아니야. 성실히 물을 주고 관리해주고 아침마다 좋은 말을 건네며 햇볕을 받게 해 주지. 청년의 집, 냉장고 위에 햇볕이 잘 드는 창 밑 가장 좋은 자리에 녀석들을 두는 거야. 그렇지만 어김없이 녀석들은 시들기 시작해. 하루하루가 갈수록 생기를 잃어가지. 그래도 관리를 소홀히 하지는 않아. 오히려 그렇게 식물들이 거의 생의 끄트머리로 내몰릴수록 더 철저히 관리를 해. 마치 자신의 잘못으로 그들이 죽어가는 것이, 죽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증명하려는 듯이 하지만 별 수 없어. 식물들은 그 청년의 집으로 오기 전, 그 청년이 그들을 발견했을 무렵 이미 죽을 놈들이었거든. 청년이 식물에게 주었던 지극 정성을 아는 사람들은 말하지 너의 잘못은 아니라고. 너는 충분히 노력했다고 그 말은 맞아 문제는 청년의 선택에 있었으니깐.


어느 때처럼 죽어서 말라비틀어진 식물들에게 물을 주고 있는 나른한 오후야. 청년은 도서관에서 ‘사건의 철학’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논고’와 같은 따분하면서도 현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을 여행하다가 돌아와. 그 책들이 청년의 삶을 바꾸어 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냥 청년은 읽을 뿐이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도 말이야. 그 책들을 읽을 때면 청년은 자신의 삶을 기호화시켜서 어디론가 데리고 가 그리고 그것들이 가지는 나름의 가치들을 자신의 머릿속이라는 무균실로 옮기지. 그곳에서 실험은 시작되지 방해도 없고 소리치는 사람도 없어. 그 속에서는 청년과 청년의 기호들만이 축제를 벌이고 있지. 그런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소동을 끝내고 그는 집으로 돌아와. 집 문을 열자 그가 의도치 않게 만들어놓은 공동묘지를 마주하게 돼. 이제는 푸른 빛깔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완전히 짙은 갈색으로 초라하게 서있는 식물들을 보는 거지. 청년은 코끼리 모양의 물뿌리개를 빼들어 도로 살아나지 않을 것이 분명한 그들에게 물을 주어. 물을 주는 도중에 전화가 걸려와. 한 손에는 코끼리 물뿌리개, 다른 한 손에는 전화기를 든 채 그는 대답해. 네 ‘청년’입니다.

전화의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면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야 해. 그걸 지금 해줄게. 한때 작년에 그러니까. 아직 청년이 페달을 정열적으로 밟아가고. 내리막길이 아닌 언덕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무게를 끌어올려야만 올라갈 수 있는 오르막을 올라가고 있을 때 청년은 진실로 한 여자를 사랑했어. 그 여자는 하얀 여자였지. 그래 너무나 하얀 여자였어. 대학가의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사랑했지. 그녀는 자신처럼 티 없이 맑은 소설만을 읽었고 밤에는 해피엔딩으로만 끝나는 영화를 보고 잠들었어. 가을이면 벤치에 앉아서 낙엽이 지는 것도 보았지. 다른 사람이 보면 황량할 수도 있는 그 풍경은 그녀가 보기 때문에 맑고 아름다운 장면이 되어갔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녀를 통해 값진 일들이 되어가는 것 같았지. 그녀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만을 분리해 보여주는 프리즘이었던 거야.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었지. 청년 또한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어. 그러다 우연히 청년은 하얀 여자와 시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어. 우연하게 첫 두 수업을 둘은 바로 옆에 앉게 되었고. 그 자리는 1학기 내내 고정석이 되었지. 둘은 매 수업 같은 자리에 앉았고 결국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벌어졌어. 청년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 더 특별하고 싶다 생각하게 되었다는 거야. 그는 그녀 또한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봐주길 바랐어. 맛있는 컵케이크를 나눠먹고 싶고, 그늘이 넓은 나무 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같은 책을 나눠 읽는 것 따위를 바라는 거야. 하지만 이런 이야기의 결말은 대부분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너도 알 듯이. 청년의 바람도 비극을 피할 수 없었어.

한 여자에게는 약속된 남자가 있었지. 아주 멋진 남자였어. 여기서 약속된 남자란 말은 너도 상상할 수 있듯 그 여자의 남은 미래를 맡길 수 있는 그런 남자란 말이야. 그녀와 남자는 예정된 절차를 밟아가듯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가까워져야만 했어. 운명이 그들이 맺어지길 원했으니까.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 정해진 운명 사이로 ‘청년’이라는 불순물이 끼어들어 버린 거야. 청년은 그녀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했어. 그녀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 왜냐하면 약속된 남자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청년’이 너무도 가여웠어. 그의 진심이 너무도 간절해서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그녀는 그저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청년’을 다독여주었어.

그러나 약속된 시간이 되자 약속된 남자와 그녀는 약속에 따라 행동해야 했어. ‘청년’과 그녀는 선로 앞 신호등에 선 두 사람처럼 자신들의 사이로 지나가는 사건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어. 청년은 무기력하게 그 일련의 사건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만 보아야 했고 사건의 열차들이 지나가고 가자. 건너편엔 이제 그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 청년은 뜨거운 사랑 대신에 내의와 플리스, 파란색 야상을 입고서 겨울을 견뎌낼 준비를 해야 했어. 청년이 계절의 틈에 빠져버린 식물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을 거야.

그래 아까 어딜 이야기하고 있었지. 그래. 그런데 2년의 가을과 겨울의 사이에서 또 한 번의 구조-죽을 식물을 데리고 오는-가 끝마칠 때쯤 동기에게서 연락이 온 거야. 비보였지. 바로 눈처럼 하얀 그 여자의 죽음이었어. 사고였다고 했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가? 청년은 묻지 않았어. 대신에 조용히 알겠다며 전화를 끊고 죽어가는 식물들을 천천히 바라보았어. 오후의 진한 햇빛들이 마른 잎들을 거쳐서 청년의 눈을 비추었어. 눈이 부셨지만 청년은 한동안 그 빛을 온전히 받기 위해 애를 썼지. 그렇게 한참을 서있다. 청년은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 집을 나섰지.

청년은 여자의 장례식 장으로 들어갔어. 사람들은 그를 쳐다보았지, 누구보다 그녀를 진실로 사랑했다는 소문은 유명했으니까.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들 궁금한 눈치였어. 왜냐면 청년이 장례식장을 들어서는 순간까지도 너무도 덤덤한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거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은 그 감정의 수위를 극적으로 반전시킬 드라마틱한 전개를 기대했는지도 몰라. 모두가 이런 생각이었거든 ‘이제 몰려온다, 그것이, 그것이!’ 하면서 말이야.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그녀의 영정사진 앞으로 다가갈 때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그를 주시했어. 그런데 청년은 전혀 울지 않았어. 조심스럽게 국화를 영정사진 밑에 두고 그녀의 밝은 얼굴을 쳐다보았어. 청년은 싱긋 웃어 보이더니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어. 코끼리 물뿌리개였지. 사람들은 청년이 무엇을 하려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어. 장례식장에는 웅성거림이 잡목처럼 우거졌어. 웅성거림을 가뿐히 저어 내고 그는 물뿌리개를 들고 영정사진에 바투 다가가 모두가 예상하지만 설마 그렇게 할까 싶었던 그 일을 해버렸어. 그녀의 사진에 차분히 물을 주는 행위를 말이야. 코끼리 코에서는 물이 쏴아 쏴아 하고 나왔지. 영정 사진의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 위로 계속해서 물이 흘러내렸어. 코끼리 배에 찼던 물이 다 사라지고 나자 청년은 익숙한 일과 중 하나인 식물에 물 주기를 처리하듯이 가볍게 손목을 털어내고 가방에 물뿌리개를 집어넣었어.

청년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섰고 이런 상황에 대해 예비해둔 말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의 가족들을 비롯한 장례식장의 모든 사람들은 조용해졌어. 입을 다물고 장례식장 밖으로 나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끈질기게들 쳐다보았지.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었기에 그랬을 거야.

청년이 떠나고 나자 영정사진에 밝게 웃는 그녀는 생기가 있어 보이기도 했고, 아직 사진에 남아 있는 물기 때문인지 얼핏 우는 것 같기도 했지. 청년이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고 해. 왜냐하면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거든. 그럼 다음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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