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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오후 베란다 창문 너머로 깨질 듯한 하늘을 바라보며 전화를 걸었다. 산지 얼마 되지 않은 세탁기가 고장 났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저희 다성전자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곧-
“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세탁기가 고장 나서 AS 받고 싶은데요.”
“네 먼저 불편드려서 죄송합니다. 지슴 기사님에게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일반 제품 문의는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이용하면 더 빠른 답변을 들을 수-
“네 여보세요.”
“기사님이시죠?”
“네 그렇습니다.”
“세탁기가 고장 나서요. 무상 수리 가능하죠? 산 지 보름밖에 안 됐는데.”
“모델명이랑 제품번호가 어떻게 되죠?”
“그게 어디 있죠?”
“그 세탁기 옆면에 전력 사용량 표시 밑에 보면 있을 겁니다.”
“네 잠시만요.”
뒤로 가 세탁기 모델명과 제품번호를 확인했다. 모델명은 T18EN, 제품번호는 RMO78KQPUI였다. 한 자, 한 자 천천히 읽었다. 답이 없었다. 연결이 끊어져 있었다. 기사 직통 번호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대표전화로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먼지 같은 짜증 쌓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저희 다성전자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리-
“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세탁기가 고장 나서 전화했는데요.”
“네 먼저 불편드려서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시면 기사님에게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일반 제품 문의는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이용하면 더 빠른 답변을 들을 수-
“여보세요, 다성 전자입니다.”
같은 기사 목소리였다.
“네 아까 전화드렸던 사람인데요. 세탁기 모델명이랑 제품번호는-”
“고객님 말씀 중에 실례지만 무슨 문제로 전화하셨나요?”
“세탁기가 고장 나서 연락드렸어요.”
“아, 죄송하지만 연결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다른 부서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아까 기사님이-”
-일반 제품 문의는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이용하면 더 빠른 답변을-
“예. 전화 바꿨습니다.”
“기사님이신가요?”
“무슨 기사님 말씀하시는 거죠? 저는 이명희 실장입니다.”
“세탁기 AS 받으려고 전화했는데요.”
“죄송하지만 전화 잘못 거신 것 같습니다. AS센터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신호음이 들리고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약간 화가 난 어조로 고장 난 세탁기 때문에 전화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는 으레 들려야 할 친절한 상담원의 목소리 대신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설마 나 때문에는 아니겠지.
“괜찮으세요?”
역시 대답 대신 흐느낌만이 들렸다. 숨을 참아가며 우는 소리가 서럽게 들렸다. 먼저 전화를 끊는 것이 께름칙해서 나는 입을 다문 채 듣기만 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수화기 너머로 뭔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죄송합니다. 고객님.’이라는 울먹임과 함께 전화는 끊어졌다.
걱정이 되어 전화를 다시 걸었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저희 다성전자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만 기다리-
“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세탁기에 문제가 있어요. 아, 그리고 거기 직원 분 중 한 분이 울고 계시던데-”
“네 알겠습니다. 곧 전화 연결해드리겠습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고장 난 세탁기 때문에 전화를 드리긴 했는데, 거기 직원 분 상태가 좀-”
“네 고객님이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른 분 연결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총 15명의 직원들의 탁구공이 되었고 그들은 나를 가볍게 쳐 넘겼다. 마침내 AS 문의 가능 시간이 지났다. 별 수 없이 오늘은 손 빨래였다. 비누를 셔츠 안에 넣고 비비면서, 울던 직원을 떠올렸다.